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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터 회고록『신의를 지키며』(8)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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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나는 수없이 많은 시간을 중동문제로 보냈다. (일기·1977년3월7일)
-각료들과 말다툼을 벌여가면서까지 나는 우리가 중동에 좀더 공격적인 자세를 취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일기·1978년2월3일)
-「도브리닌」워싱턴 주재 소련대사는「밴스」(미 국무장관)가 중동문제에서 손을 떼고「그로미코」(소 외상) 와 더불어 전략무기제한회담 (SALT) 문제를 해결하기를 바랐다.(일기·1979년1월10일)
중동에 관한 나의 관심은 내가 백악관에 들어가기 훨씬 전, 그러니까 조지아주지사시절 「글다·메이어」이스라엘 수상의 초청으로 그 나라를 방문했던 73년5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스라엘은 어린 시절 주일학교를 다닐 때부터 성서를 통해 배워왔지만 직접 성지를 순례함으로써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고 감명을 받았다.
이스라엘방문은 마침 무역사절로 유럽순방직후 이뤄졌는데 아내「로절린」과 비서실장「즈디·파웰」이 동행했다. 우리는 갈릴리 해를 돌아보고 가버나움의 언덕 위에 올라가 보기도 했으며 베들레헴에 가서 경배를 드리기도 했다.

<중동에 소 입김 우려>
그런가하면 예루살렘의 구 시가에서 새벽산책을 즐겼고 골란고원의 험준한 산악을 찾아가 보았다. 요르단 강을 따라 옛 역사의 현장을 더듬으면서 이 작은 나라를 둘러싸고 전개되는 새로운 역사를 잠시 생각해보았다.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에는 이러한 감상적인 면도 있었지마는 미국의 국가이익을 위해서 중동이 안정되고 평화가 깃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소련의 영향력이 중동에까지 확장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이러한 측면에서 미국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은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라고 생각했다.
이에 반해 아랍국가들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 것도 없었고 강한 느낌을 받지도 못했다. 그때까지 아랍지도자룰 만나 본적이 없었다.
그런데 아랍권에서 이집트가 친소성향을 버리고 중립 쪽으로, 그리고 나중에는 오히려 친미 쪽으로 선회한 정세변화가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에 군사적인 위협을 실질적으로 줄 수 있는 나라는 아랍권에서 이집트뿐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들 두 나라는 4차례의 중동 전을 치르면서 적대관계를 가지고 있었고 특히 73년 욤키푸르 전쟁이후 외형상으로는 교전상태에 있었다.
나는 대통령선거전을 치를 때도 그랬지만 당선된 후에도 나의 보좌관들과 중동에 관련된 정세, 이를테면 이스라엘의 안보, 소련의 영향력, 중동평화, 석유수입 등에 관해 토의를 계속해왔다. 중동에 관한 문제라면 가능한 한 모든 사람들로부터 자문을 구했고 이제까지 수많은 중동문제해결책이 제시됐으나 대부분 실패로, 돌아갔다는 사실도 알게됐다.


이에 따라 중동에서 미국에 대한 위협이 차츰 증대되고 있음을 깨닫게되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새로운 노력을 시도해 보기로 결심했다.
나는 중동문제를 연구하는데 엄청나게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았다.
-이스라엘의「라빈」수상이 워싱턴을 방문했을 때 나는 그에게서 중동평화정착을 위해 이스라엘이 궁극적으로 무엇을 희망하는지 알게 되기를 바랐다.
그는 고집스럽고 거북한 상대였다. 공식만찬석상에서「팁·오닐」하원의장이 그에게 어떤 조건 하에서 팔레스타인을 제네바회담에 참석시킬 것이냐고 묻자 그는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뿐 아니라 다른 어느 팔레스타인대표들과도 절대로 만날 수 없다고 대답했다. 나는 「라빈」수상을 2층으로 데리고 올라가 내가 아랍지도자를 만나면 이스라엘은 내가 무엇을 해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어 보았다. 그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일기·1977년3월7일)
나는「라빈」수상이 매우 이지적이며 개인적으로 용기 있는 인물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와의 첫 대면은 유별나게 불유쾌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그는 이스라엘의 여러 지도자 가운데서 뛰어나게 새로운 아이디어들을 창출하고 미국과의 장래 관계진전 등에 대한 토론 등을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가 나에게 남겨준 그릇된 인상으로 우리가 평화를 위해서는 또 다른 노력을 해야한다고 만만했다.
이스라엘은 그들이 한쪽으로는 전쟁과 테러리즘을 두려워하고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어느 누구도 끝날 줄 모르는 폭력사태의 연속으로 얼마나 많은 인명과 재산피해가 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알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이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선뜻 나실 생각을 품고있었으나「라빈」수상을 만남으로써 내가 겪어야할 도전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힘들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라빈」수상이 평화협상을 추구하는데는 별로 흥미가 없었지만 그의 방문은 미국이 이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도록 하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77년 3월9일에 있었던 백악관 기자회견에서의 주제는 바로 이 문제였고 기자들 또한 집중적으로 이 문제를 파고들어 질문공세를 폈다.
나는 안보상 필요를 제외하고는 이스라엘 점령군이 1967년의 국경선으로 철수해야 하며 주변 아랍국가들은 이스라엘에 대한 적대행위를 중지하고 이스라엘이 중동에서 평화적으로 살 권리를 인정해야 된다고 주장해 왔었다.
그밖에 자유로운 무역교류와 관광 및 문화교류가 양자간에 이뤄져야 된다고 생각했다.

<솔직·담박한 사다트>
나는 기자들에게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 사우디아라비아의 지도자들을 오는2개월 안에 만나보겠다고 발표했다.
77년4월4일은 나에게 중동문제에 뱃살이 밝게 비추었던 날이었다. 처음으로 훗날 역사를 뒤바꾸어 놓는데 주역을 한「안와르·사다트」이집트대통령을 만났기 때문이었다.
그의 방문을 기다리는 동안 나는 몇 주일 동안 이집트와 그에 대해 연구를 해왔다. 동북아프리카와 시나이 반도에 대한 미국의 개입, 이집트에 대한 경제원조, 「사다트」대통령의 주변 아랍지도자들과의 관계 등을 살펴보았다.
「사다트」의 워싱턴방문 첫 머리에서 나는 그에게서 조금은 수줍어하거나 거북스러운 듯한 인상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워싱턴으로 오는 도중 파리를 들렸을 때 몸살을 앓아 건강이 안 좋은 상태라고 말했다.
나는 곧「사다트」가 솔직하고 매력적이며 용기를 가졌고 어려운 정치적 결단을 내리는데 조금도 위축되지 않는 훌륭한 지도자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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