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곳간 빈 산유국 타격 … "빈곤층 지원 끊길 땐 정권 위협"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4면

석유 전쟁이 국제정치 지형을 뒤흔들기 시작했다.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생산량 감축의 합의 실패 영향은 시장에 즉각 나타났다. 서부텍사스 중질유는 11월 30일(현지시간) 뉴욕상업거래소 전자거래에서 배럴당 64달러 10센트로 떨어졌다. 2009년 7월 이후 최저가다.

<여기를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기름값 하락은 산유국에 직격탄이다. 그러나 산유국이라고 사정이 모두 같진 않다.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해 카타르·쿠웨이트 등 ‘부자 산유국’들은 쌓아놓은 외환보유고가 많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이들 나라의 재정은 배럴당 70달러에도 버틸 수 있는 정도다.

 그러나 이란·이라크·베네수엘라·나이지리아 등 ‘가난한 산유국’들은 처지가 다르다. 이란의 경우 재정의 손익분기점 기준이 배럴당 136달러, 베네수엘라와 나이지리아는 배럴당 120달러다. 이라크의 하이데르 알아바디 총리는 의회에 “2015년 예산안은 폐기하고 새 예산안을 10일내 편성하겠다”고 보고했다. 원유 수출가를 배럴당 70달러로 예상하고 예산을 짰는데, 이미 60달러 중반 아래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러시아라고 다를 게 없다. 추산되는 러시아의 손익분기점은 배럴당 101달러다.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노박 에너지 장관은 “배럴당 100달러를 가정한 내년 예산안은 수정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예산 조정은 단순히 숫자를 고치는 문제가 아니다. 긴축에 따라 서민과 빈곤층 지원이 중단된다. 재정 악화로 인한 통화가치 하락은 수입물가를 올리고 생필품 가격이 치솟는다. 먹고 살기 힘들어진 대중의 분노와 불만은 정권을 흔드는 법이다. 영국 왕립국제문제연구소의 폴 스티븐 수석연구원은 “OPEC의 상당수 회원국들은 균형재정을 위해 배럴당 100달러 이상을 필요로 한다”며 “정부가 빈곤층을 지원할 수 없게 되면 정치적 소요와 격변이 발생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단순 기우가 아니다. 원유 수출이 GDP의 25%, 수출의 95%를 차지하는 베네수엘라는 올 초부터 혼란으로 빠져들었다. 물가 앙등과 소비재 부족으로 벌어진 폭동 때문이다.

 석유 전쟁은 단순히 몇몇 나라의 불행으로 그치지 않는다. 중동과 남미 주요국의 정정 불안은 국제 질서에 충격을 가져온다. 엄포가 아니다. 역사적 전례가 있다. 1980년대 중반의 유가 폭락이다. 국내엔 저금리·저달러와 함께 ‘3저 호황’으로 불리던 시대였다. 1970년대 1, 2차 오일 파동으로 인한 경기침체와 세계 각국의 원유 소비 감소로 석유시장은 순식간에 공급과잉으로 변했다.

산유국들이 공급 제한에 실패하자 석유 가격은 곤두박질했다. 86년 석유값은 배럴당 27달러에서 10달러 아래로 떨어졌다. 유가하락은 옛 소련에게 특히 가혹했다. 석유는 소련의 돈줄이었다. 유가가 폭락하자 재정이 직격탄을 맞았다. 부실한 재정으론 미국과 체제 경쟁을 계속 하는 것도 버거웠고, 연방을 유지하기도 힘겨웠다. 결국 소련은 붕괴했다.

 이런 상황의 재현은 러시아에겐 최악의 시나리오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낙관론을 퍼뜨리고 있다. 그는 지난달 28일 소치에서 “겨울이 오고 있다. 시장은 내년 1분기나 중반 이전에 다시 정상을 되찾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시장은 이런 점을 감안하고도 추가하락에 베팅하고 있다. 러시아 수출의 68%는 원유 수출에서 나온다. 옛 소련 연방과 별로 다를 게 없는 구조다. 경제는 침체로 접어들고 있다. 러시아 루블화 가치는 6개월 새 30% 이상 하락해 사상 최저로 떨어졌다.

 지구촌 한 쪽에선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석유전쟁을 즐기는 나라도 있다. 중국이다. 비축유 확대에 혈안이었던 중국으로선 유가가 급락하는 지금이 절호의 기회다.

 노무라 홀딩스의 원유 분석팀장 고든 콴은 “더 많은 전략유를 저가에 비축할수 있는 황금 기회”라며 “중국이 OPEC 결정의 수혜자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뿐만 아니다. 베네수엘라 정부는 경제가 곤란해지면 중국에 손을 내밀 것으로 관측된다. 중국으로선 제 3세계에 영향력을 확대할 기회가 열리는 것이다.

 석유 전쟁은 앞으로 무자비한 공급자 전쟁으로 치달을 태세다. 가격을 낮춰 상대의 공급 능력을 무력화시키면 살아남는다. 하지만 전쟁에서 패한 나라의 상처는 예상보다 훨씬 더 참담할 수 있다고 역사는 말해준다.

뉴욕=이상렬 특파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