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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헌화와 묵념의 갈림길에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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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북한 당국은 입학이나 결혼식과 같은 주요 행사나 제대하고 새로운 직장을 갖는 등 개인의 신상에 변화가 있을 때마다 주민들이 대성산 혁명열사릉 혹은 금수산 기념궁전이나 김일성 동상에 헌화하고 묵념하는 것을 관습법화했다. 헌화와 묵념을 통해 체제에 대한 충성을 자연스럽게 유도하고 수령체제 수호 의지를 다지는 의식이다. 따라서 북한 주민들에게 체제상징물에 대한 헌화와 묵념은 주체사상적인 삶의 요체이고 다짐이다.

▶ 남성욱 고려대 교수·북한학

북측이 남측 인사의 평양 방문 시 순안공항을 출발하여 처음으로 안내하는 곳이 수십m 크기의 대형 김일성 금색 동상이다. 꽃바구니까지는 아니더라도 한 송이 꽃으로라도 엄숙하게 헌화하는 북한 주민들을 보며 숭배문화에 낯선 남측 방문객들은 목례와 같은 엉거주춤한 행동이나 기념사진 촬영 등으로 난처한 순간을 모면한다.

북한은 수령체제 유지의 독특한 관습인 참배 의식을 통해 남북 관계에 또 하나의 이니셔티브를 쥐었다. 1970년 북한이 무장공비를 보내 국립묘지의 정문을 폭파하고자 한 전력을 감안할 때 현충원 참배는 파격적인 행보다. 정부가 북한의 제안을 받고도 나흘간이나 공개하지 못하고 내부 논의를 거친 것만 보아도 참배라는 사안의 복잡성을 짐작할 수 있다. 미래지향적 과거사 정리를 한다는 차원에서 남측의 참배 허용은 불가피했다. 새로운 남북관계를 지향한다면서 가장 핵심적인 문제를 공론화하지 못한다면 신(新)남북시대의 개막은 곤란하기 때문이다.

북측은 현충탑을 참배하면서 남측 못지않은 복잡한 계산을 했을 것이다. 북측 대표단은 6.25 전사자 위패와 무명용사 유골이 봉안된 현충탑에 참배하면서 존경의 표시인 헌화는 생략하고 가장 낮은 단계의 예절인 묵념만 하였다. 김기남 대표 역시 참배의 부담 때문에 '조국 광복을 위해 생을 마친 분들이 있어 방문'하는 것이라며 방문의 의미를 협의(狹義)로 해석했다.

전략과 전술에 능한 북측은 10분여간의 짧은 방문으로 다양한 효과를 겨냥했을 것이다. 우선 참배를 통해 '우리 민족끼리' 콘셉트를 극대화하며 휴회상태인 북핵 6자회담에서 민족공조 코드를 정확하게 맞추고자 하는 국제정치적인 역학관계를 고려하고 있다. 다음은 남측 인사의 평양 방문 시 애국열사릉 등을 방문해야 하는 상호주의의 적용도 염두에 두고 있다. 국립묘지와 금수산 궁전의 성격이 판이하나 북측이 선수를 친 만큼 우리로서도 거부할 명분이 약해졌다. 북측은 자신들이 화해의 제스처를 취한 만큼 남측도 구태를 벗어나 '용기 있는' 행동을 할 것을 묵시적으로 요청할 것이다. 정부도 참배의 범의(犯意) 여부로 혼란스러운 국민을 위해 방북 시 관련 사전지침을 마련해야 한다.

사실 북측의 참배는 6.25 전쟁에 대한 최소한의 유감표시로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북측 대표단장의 설명대로 광복 60주년을 맞이하여 항일투사들에 대한 예의에 근접하다. 북측도 진심 어린 헌화와 분향 및 묵념 등 국가수반의 국립묘지 참배에 준하는 완전한 의전절차를 갖추기에는 넘어야 할 산이 많을 것이다.

김정일 위원장의 결단에 따라 향후 남북관계는 일거에 과거를 뛰어넘는 예상치 못한 획기적인 제안들이 봇물을 이룰 것이다. 화해의 시대사적인 조류는 남북한의 민족주의 경향과 맞물려 급물살을 탈 수도 있다. 정부는 남북 간 스킨십을 넓히는 과정에서 투명성의 확보와 여론수렴에 유의하고, 보.혁 갈등으로 비화되지 않도록 세심하게 대응해야 한다. 특히 남북한은 화해와 협력의 시대가 국제사회의 도도한 흐름과 배치되지 않아야 성과를 거둘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남성욱 고려대 교수·북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