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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이재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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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우리나라 수의(壽衣)의 역사는 그다지 깊지 않다. 평상복 차림의 매장 역사는 유구하지만 따로 수의를 장만한 것은 조선조 후기로 추정된다. 당시 유력한 왕실 종친이자 예조판서를 지낸 이연응 묘역에서 1999년 발굴된 공단(무늬 없는 비단)은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독특한 바느질 방식에다 평상복과 전혀 다른 비단 수의가 처음 출토된 것이다.

이 수의를 지어 올린 아들이 바로 이재극이다. 끗발 좋은 집안을 배경 삼아 구한말 두루 높은 벼슬을 누린 인물이다. 관찰사와 한성판윤에다 법부대신.학부대신.내부대신.궁내부대신까지 지냈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 당시에는 궁내부대신이었다. 왕실 업무를 총괄하는 노른자위 핵심 요직이다.

그해 11월 3일 그는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을 맞아 일본 공사관에 초대됐다. 잔치가 파할 무렵 "일본 천황 만세"를 삼창했다. 격노한 고종이 꾸짖었다. "신하는 제 나라 국왕에게만 만세를 부르는 것이 법도 아니냐." 돌아온 대답이 고약하다. "반자이(만세의 일본말)라 했을 뿐, 만세라 하지 않았나이다."

고종실록과 승정원일기는 이후 보름 동안 친일파로 완전히 변신하는 그의 모습을 묘사한다. 11월 17일 을사늑약 체결 과정에서 이완용 못지않은 핵심 역할을 맡았다. 궁내의 동정을 탐지해 일본에 제공하고, 을사늑약을 고종에게 갖고 가 칙재(勅裁:임금의 결재)를 받아낸 인물도 이재극이었다. 을사오적 처단을 시도한 나철은 암살 명단에서 그를 빼놓지 않았다.

이재에도 밝았다. 그는 구한말 처음으로 서울에 직포공장을 차려 재물을 모았다. 1908년에는 동덕여자의숙을 세웠다. 일본은 친일노선에서 벗어난 적이 없는 그에게 남작 작위와 은사금 2만5000엔으로 보답했다.

지난주 82세의 이재극 손자며느리가 국가를 상대로 소유권보존등기말소 청구소송을 냈다. 시할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땅을 되찾겠다는 것이다. 9년 전 문산과 포천의 토지 소송에 이은 제3막이다. 두 차례 소송에서 이미 절반의 승률을 거둔 때문일까. 을사늑약 100년과 광복 60주년을 정면으로 겨냥하는 친일파 후손의 당당함마저 엿보인다. 과거사 정리에 핏대만 세울 때가 아니다. 특별법은 이럴 때 만들라고 생긴 제도다.

이철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