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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터 회고록『신의를 지키며』(3)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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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밴스」와「브레진스키」와 나는 마무리 협상을 빠르게 추진하되 우리 쪽의 정상화조건은 일절 바꾸지 않기로 했다. 우리는 등소평이 보낸 공동성명 초안을 거부하고, 우리가 앞서 제의한 표현을 쓰자고 거듭 주장했다.
나는 또「브레진스키」로 하여금 워싱턴 주재 연락사무소장 시택민 (황진의 후임자)과 만나 우리가「우드코크」에게 보낸 지시사항을 함께 검토하도록 했다. 그것은 중공지도자들에게 미국쪽 초안은 내가 직접 작성한 것임을 알리는 한편 등소평에게 나의 새로운 제안을 미리 전해「우디코크」와의 회담에 대비토록 하기 위해서였다. 새 제안이란 등소평의 미국방문이었다.
「브레진스키」는 관계정상화가 매듭 지어진 후 가능한 한 빠른 시일 안에 등소평이 미국을 방문해 달라는 나의 초청을 시에게 전달했다.「브레진스키」는 또 미국은 소련과의SALTⅡ협상에서 주요문제는 다 해결지었으며 곧 나와「브레즈네프」의 정상회담 일자가 결정될 것이라고 그에게 귀띔했다.「우드코크」를 만난 등소평이 내게 보낸 전언은 신속하고 간결했다.『중공은 미국의 초안을 채택할 것이며, 귀국을 방문해달라는 대통령의 초청을 수락한다.』내가「옥센버그」에게 등소평의 회답이 놀라우리만큼 빨랐던 까닭을 묻자『대통령각하, 중국인들은 이 문제가 제기되기를 25년 동안이나 기다려온 겁니다.』 이젠 더 협상할게 없었다. 이번엔 내가 등소평을 놀라게 할 차례였다. 나는 우리의 협정을 불과 이틀 뒤「밴스」가 중동에서 돌아오는 대로 공표하자고 제의했다. 발표를 서두른 건 결정내용이 신문 방송에 조금씩, 그것도 이 결정을 반대하는 누군가에 의해 왜곡되어 새나갈 위험을 아예 없애자는 뜻에서였다. 그때까지는 놀라울 정도로 비밀이 잘 지켜졌지만, 운만을 계속 믿고 있을 수는 없었다.
등소평은 워싱턴 시간으로 78년 l2윌15일 하오9시에 양국에서 동시에 공동성명을 발표한다는데 동의했다. 이 시간에 맞추기 위해 우리는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의회의원들에게 브리핑을 하고, 보도자료를 준비하고, 외국지도자들에게도 알려져야 했다.

<공동성명 초안 합의>
게다가 등소평은 방미초청을 받아들이면서 방문시기를 양국 국교가 발효되는 79년1월1일로부터 한달 이내로 아주 이르게 잡았기 때문에 바쁨은 더했다.
-발표순간까지 비밀을 지킬 수 있을는지, 중공과의 관계정상화를 둘러싼 흥분은 시간과 함께 더해가고 있다. 소련과 대만·일본, 그리고 유럽의 주요 맹방들엔 내일 일찍 통고하기로 했다. 그때쯤이면 우리 정부안에선 1백명쯤이 이 사실을 알게될 것이다. (일기·78년12월14일) 기적적으로 협정의 비밀은 완벽하게 지켜졌다. 15일 낮 동안 우리는 적절한 순서에 따라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언론 쪽은「밴스」와「브레즈네프」가 맡았다. 일본의「오오히라」(대평정방)수상과「닉슨」「포드」전 대통령, 그리고 의회지도자 몇 사람에겐 내가 전화로 연락했다.
「닉슨」전 대통령은 매우 흐뭇해하면서 이 업적이 세계에 미칠 영향을 잠시 논했다.
나는「옥센버그」를 그에게 보내 이번 협정에 관해 자세히 보고토록 하겠다고 말했다.「닉슨」은「옥센버그」가 믿을 만 하다고 말하면서도 비밀유지의 어려움과 아랫사람을 지나치게 믿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에 대해 내게 주의를 주는 것이었다.
-「즈비그」에게 전화로「닉슨」과의 대화내용을 얘기한 후 나는 슬쩍 중공이 협정을 취소한걸 아느냐고 물었다. 장난으로 한말이었지만 그는 까무러칠 듯 놀랐다. (일기·78년12월16일)
그럴 만도 했다. 늘 하는 대로 나는 백악관 교환 양에게「브레진스키」박사를 대달라고만 부탁했었다. 그런데 내가 모르는 새 그는 자기 가족과 함께 산책 나가 있었다.

<닉슨에 희소식 알려>
산책 도중에 가장 가까운 전화로 나에게 연락하라는 전갈을 받았으니 무슨 비상사태가 일어 났겠거니 믿을 만도 했다. 나중에 우리는 이 일을 웃으며 돌아볼 수 있었지만 당시 나는「브레진스키」를 그토록 마음죄게 한데 대해 후회를 금할 수 없었다.
나와 외교정책팀은 우리가 이룩한 업적이 자랑스러워 즐겁고 느긋한 기분에 젖어 있었다. 이런 기분은 모든 사람에게 옮아가는 듯 했다. 의회와 전국에서 벌어지려니 예상했던 심각한 반대운동은 낌새도 보이지 않았다.
세계의 반응도 놀랄 만큼 긍정적이었다. 대만에서는 반미시위가 있었지만 대부분의 나라들은 이번 사태발전이 평화에 기여하고 중공의 문호를 더욱 넓힐 역사적인 것이라고 보았다.
대만국민들에 대한 우리의 자세는 공경하고 솔직했다. 우리는 미국과 중공의 새로운 관계가 대만국민의 복지를 위협하지 않도록 중공과의 협정 속에 특별조합을 마련했던 것이다. 즉 미국은 현재 대만과 맺고 있는 통상· 문화· 교역관계를 일본 등 다른 여러 나라들이 이미 그러고 있듯이 비 정부차원에서 계속 유지키로 했다.
이 같은 관계변화를 위해선 예전에 대사관이 수행하던 일상업무를 물려받을 기구(대북 주재 북미 사무협조위원회) 의 설립을 뒷받침할 특별법이 의회에서 통과돼야 했다. 일부 친 대만의원들은 처음엔 이 입법을 반대하겠다고 위협했지만, 미·중공 수교가 대통령의 고유권한에 의해 결정된 기정사실이며 특별법제정 없이는 대만과 정상적 교역을 계속할 수 없다는 사실을 곧 깨닫게됐다.
나는 대만이 될 수 있는 한 편하게 상황변화에 적응할 수 있게 해주고 싶었다. 그래서「워런·크리스트퍼」국무차관을 친선사절로 대북에 보내 우리가 무엇을 도울 수 있을지 알아보도록 했다. 그러나 대북에선 장경국 총통정부가 부추겼음이 분명한 사나운 데모군중이「크리스트퍼」일행을 맞았다.,
나는 장 총통으로부터 이 같은 사태가 다시는 없으리라는 확약을 받고 나서야 사절단의 대북 체류를 허락했다. 「크리스토퍼」는 2∼3일간 대만사람들과 회담했으나 빌 성과는 없었다.
소련지도층은 겉으로는 줄곧 냉정한 체 했지만 곧 태도를 바꿔 나와 세계지도자들에게 긴급서신을 띄우기 시작했다.
-지난 27일「브레즈네프」로부터 매우 우울한 서한을 받았다. 소련이 중공에 대해 편집증에 가까운 피해의식을 갖고있다는 걸 보여주는 편지로, 서방국가들이 중공에 방위용 무기를 팔지 못하게 해달라고 내게 요구하는 내용이다. 며칠 더 끈 뒤 회신할 예정이다. (일기· 78년12월31일)
소련은 대 중공무기판매롤 고려할 가능성이 있는 나라의 지도자들에게 위협조의 편지를 보내고 있었다. 2∼3주일 뒤 나는「브레즈네프」에게 미국은 중공·소련 어느 나라에도 무기를 팔지 않을 방침이라고 통고하고, 그러나 이 문제에 관해 다른 주권국가들에 영향력을 행사하지는 않겠다고 못박았다.
당시 영국과 프랑스는 중공에 무기를 팔기 위해 교섭 중이었다.
보다 시급한 것은 교역문제였다. 미국의 무역 법은 교역강대국의 이민정책이 가족의 자유로운 재결합을 허용하지 않는 한 「최혜국」의 지위는 줄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수정조항으로 추가된 이 규정은 원래 소련과 일부 동구국가들을 겨냥한 것이었다. 이들은 서방에 있는 가족들과 합치기롤 바라는 유대인등 소수민족들의 이주를 억압적으로 규제하고 있었다.

<소련선 외교적압력>
물론 중공은 그런 정책을 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무역상의 유리한 지위를 주는 데 법적인 장애는 없었다. 하지만 중공을 그렇게 대우하는 경우 우리의 교역상대국인 양대 공산국가 사이엔 불균형이 생긴다. 또 최혜국 결정은 의회의 승인을 받아야하는데 많은 의원들은 중·소 어느 쪽에도 그 같은 지위를 주는데 반대할 것이었다.
나는 대통령이 된 후 줄곧 소련지도자들에게 유대인등의 재외 가족합류를 허용하라고 권유했다. 이 노력은 상당한 성과를 거뒀으므로 나 개인적으로는 소련과 중공에 나란히 최혜국지위를 주었으면 했다.
등과의 만남에 앞서 나는 中共에서 방송될 TV회견을 가졌다. 여기서 나는 중국 국민들에게 새로운 미·중공관계가 미국에, 태평양지역에, 그리고 전세계에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지를 강조하고 미국국민들이 이번 결정을 기뻐하고 있으며 이 같은 감정은 등소평 부주석과 그의 부인 및 일행에 대한 열렬한 환영에서 증명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 TV프로그램은 중공에서 되풀어해 방송돼 내가 나중에 중공을 방문했을 때 거리의 시민들은 내 얼굴을 쉽게 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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