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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진보당사건 (20)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진보당사건을 보는 눈은 극단의 두갈래로 엇갈린다. 그런 견해의 차이는 법정에서 유별나게 드러나 보였다. 수사당국은 진보당을 좌경집단이라는 눈으로 봤고 그런 기준에서 모든 것을 재판했다. 반면 진보당측 피의자들은 정치사건이라고 단정했다.
진보당사건의 피고인들은 한결같이 당수이던 조봉암을 변호하면서 심문과정에서 고문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법정에서 밝힌 피고인들의 고문에 대한 진술 몇가지만 간추려 보자.
▲김달호(당부위윈장·국회의원)=취조담당자는 내게 「과거 박혜영사건을 아느냐? 조봉암을 좌익으로 쳐서 당신이 그자리에 앉으시오. 그렇게 하지 못하면 당신은 정치인의 자격이 없고 조봉암은 사형, 당신은 징역20년이요」라고 나를 협박하고 회유했다.
나는 그런 터무니 없는 배반은 못한다면서 그들을 꾸짖었다. 그랬더니 나의 태도가 건방지다해서 심한 모욕과 고문을 당했다.
▲조규택(당 재정간사)=1월12일새벽2시 형사대가 내집에 들이 닥쳤다. 반공법 위반으로 연행한다고했다. 서울시경 사찰분실이던 세칭 남일사로 연행됐다. 경찰은 죽산이 공산당이라는 사실을 자백하라고 했다. 진보당의 평화통일론은 남북연방제등 북괴가 부르짖는 평화통일론과 같은 것이라고 했다. 그들은 진보당의 자금출처를 추궁하고 북괴자금을 받아 쓴 사실을 자백하라고 했다. 남일사에서 꼬박 사흘동안 심문을 받았다. 몽둥이로 얻어맞아 기절하기도하고 잠도 재워주지않아 나는 녹초가 돼 있었다.
사흘만에 잠깐 잠을 자다가 깨우기에 일어났다. 다른곳으로 옮긴다면서 뭘 원하느냐고 하기에 술을 청했다. 그들은 정종을 사다주기에 두병을 그자리서 들이켰다. 그들은 나를 마포서감방에 집어넣고 나가버렸다. 얼마나 잤는지 모르겠다. 깨워서 일어나니 한밤중이었다. 그들은 나를 한강변으로 데려가 위협했다. 나무의자에 묶어놓고 고춧가루 물을 넣겠다고 했다. 나는 이박사시대 이후를 생각해 봤느냐, 후세 역사가 뭐라고 할건가등 악을 썼다.
그들은 <저친구 안되겠다> 그러더니 어느 지하실로 데려갔다. 목욕을 좀 시켜야겠다는 것이었다. 과연 목욕탕은 있는데 얼음이 얼어있었다. <잘 됐다. 난 1주일에 한번은 목욕해야 하는데…> 그러면서 내 스스로 그얼음물에 들어갔다. 그랬더니 어이가 없었던지 그들은 나를 도로 끌어내 구치소로 옮겨갔다. 그리곤 끝없이 취조가 계속됐다.
▲전세룡(당 조직부차장겸 간사)=나는 죽산이 체포된뒤 피신해 있다가 2월4일 자진출두했다. 나는곧 바로 남일사로 옮겨져 취조를 받았다. 경찰은 내가 8·15꾸에 월남했다는 것을 이유로 김일성이 죽산과 함께 북한에 호응하는 정당을 하라고 나를 남으로 파견했다는 자백을 하라고 했다.
나는 북한에서 반공운동을 하다 사선을 넘어 남으로 왔다는 사실을 말하고 대들었다. 그랬더니 모진 고문을 가하기 시작했다. 물고문, 매를 던져 맞히는 이른바 필×봉고문까지 당했다.
▲이상두(경북대강사)=나는 남일사 취조실로 옮겨져 심문을 받았다. 옆방에서 고통을 호소하는 비명이 울렸다. 「저게 진보당사건으로 들어온 전세룡이지」 취조관들끼리 주고받는 말이지만 그건 나더러 들으라는 은근한 협박이었다.
▲이명하(당조직부장)=비밀당원문제로 고통을 당했다. 경찰은 군이나 경찰내에 있는 비밀당원을 대라고 가혹한 문초를 했다.
▲신창균(재정위원장)=1차 검거엔 해당되지않아 사후대책을 세우던중 14일 연행됐다. 나의 심문을 담당한 경관은 선거자금을 공산당에서 지원받았다는 사실을 시인하고 집에 돌아가는게 좋지 않느냐고 했다. 내가 이를 거부하자 끝내 그들은 난폭한 심문으로 나를 굴복시키려 했다.
피고인들의 이같은 주장을 당시의 수사관계자들은 거것말이라고 했다. 당시 서울시경 사찰관계 중요책임자로 진보당사건수사를 지휘한 K씨(본인의 요청에 따라 이름을 밝히지 않음)의 회고증언.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문의 가늠성을 이야기 하지만 고문이 그렇게 마구잡이로 무조건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또 고문 당하지도 않은 사람들이 풀려나선 고문을 당했다고 이야기하는 경우가 흔하다. 당시 대공관계에서 심한 취조란 간첩을 체포했을 때 대체로 다음 접선시간까지 입을 다물려 한다. 우리로선 그 전에 자백을 받아낼 필요가 있다. 그럴 때에 가끔 취조를 서두는 일은 있다.
우리는 죽산에겐 취조하는 동안 언제나 「죽산선생」이라는 호칭으로 전직장관에 대한 예우를 했다. 김달호씨에 대해서도 국회의원으로서의 예우를 했다고 나는 믿고있다.』
피고인들에 대한 사실 심리가 끝나고 6월5일엔 검찰측이 신청한 신도성·고정동씨, 그리고 간첩 박정호의 증언을 들었다.
그런데 정치학자며 보수진영의 이론가이기도 했던 신도성씨는 검찰의 기소내용에 반대되는 증언으로 진보당을 변호했다.
▲재판부=평화통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신=진보당 정강정책에 있는 평화통일이란 북한 괴뢰와의 협상이나 공산화를 의도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평화통일이란 것이 북괴가 흔히 쓰는 문귀와 같은 것이 돼서 「정치적 통일」로 고치자고 했으나 국민에 어필하는 감도가 평화쪽이 낫다고해서 그에 따른 것이다.
▲재판부=정강정책면에서 볼때 진보당의 성격은 어떤가.
▲신=진보당의 정강정책은 내가 만들었는데 그당시 나의 의도는 사회주의는 아직 시기적으로 적합치않고 수정자본주의 정당으로 만족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그 이념에서 정강정책을 만들었으니 수정자본주의 정치단체로 본다.
▲변호인=서상일·조봉암간의 분열 동기는 이념 때문인가.
▲신=5·15정·부통령선거때 조봉암을 부통령으로, 서상일을 대롱령후보로 지명해야하는데 그것이 뒤집혀진 것이 원인이다.
▲박정호증언(당시 간첩죄로 1심에서 유죄언도를 받고 있었음)=나는 일제 때 마포형무소에서 같이 옥살이를 한 최익환이 진보당에 관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최를 만나러 진보당 사무실에 꼭한번 갔었다. 그러나 최가 당에 나와 있지않아 만나지 못했다. 조봉암과는 면식도 없고 만난 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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