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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소송증거 확보, 법원이 돕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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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의료사고를 당한 피해자 S씨의 가족들은 올해 서울의 한 병원에 진료기록 전체를 요구했으나 받지 못했다. 법원의 문서제출명령을 받아내기 위한 방편으로 손해배상 소송을 내려했다. 그러나 병원 측이 이행하지 않아도 강제할 근거가 없다는 변호사의 조언에 따라 포기했다. 결국 증거 확보를 위해 형사 고소했지만 수사기관이 병원 압수수색을 꺼리는 사이 6개월이 흘렀다.

 올해 초 ‘나홀로’ 민사소송을 진행했던 K씨는 심리를 맡은 단독 재판장에게 증거조사와 관련해 질문을 던졌다가 면박을 받았다.

 재판장은 “내가 국선변호인을 쓰라고 했잖아요. 판사가 그런거나 대답해주는 사람인 줄 알아요”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대법원이 부실한 사실심(1·2심) 문제를 근본적으로 개선하기 위한 ‘사실심 충실화 마스터플랜’을 30일 발표했다. 이는 대법원이 최근 도입을 추진 중인 상고법원 도입의 전제조건으로 지목돼 왔던 것이다. 개선안에 따르면 민사·행정소송에서 한국형 ‘디스커버리 제도(본안 재판 전 증거조사 절차)’가 도입된다. 현행 법상 ‘증거보전 신청’과 ‘문서제출 명령’제도가 비슷한 역할을 하고는 있다. 하지만 증거보전의 필요성 입증이 어렵다. 이행하지 않아도 별다른 제재 조치가 없다. 이로 인해 의료소송의 경우 원고 승소율이 지난해 기준 30.5%로 전체 민사소송의 원고 승소율(60.8%)의 절반에 불과했다. 이런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피고가 문서제출명령을 이행하지 않을 경우 원고의 주장을 진실하다고 추정할 수 있도록 하고 민사소송을 내기 전에도 증거수집부터 먼저 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개선안 대로라면 S씨는 진료기록 전체를 재판 전에 확보할 수 있게 된다. 대법원 관계자는 “정보의 비대칭으로 원고가 일방적으로 패소하는 경우를 막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재판부 구성도 크게 달라진다. 대법원은 2018년까지 전체 단독 재판장의 50% 이상을 경력 15년 이상의 지방법원 부장판사급 법관으로 배치할 계획이다. 단독재판은 그간 통상 경력 7~8년 이상, 적게는 5년 이상의 법관들이 지방법원 부장판사가 되기 전까지 담당해왔다. 서울중앙지법 기준으로 전체 단독판사 137명 중 부장판사급은 14명으로 10%에 불과하다. 그간 상식에 어긋나는 ‘튀는 판결’로 물의를 빚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대법원은 또 건설·의료 사건 등 전문적 지식이 필요한 재판에 해당 전문가들을 참석시키는 ‘전문 심리관 제도’도 도입키로 했다. 대법원은 오는 5일 전국 법원장 회의에서 이런 방안들을 논의한 후 최종 확정한다. 강연재 변호사는 “그간 하급심 강화 방안이 많이 나왔지만 의지 부족으로 흐지부지되곤 했다”며 “이번만큼은 확실한 의지를 갖고 바꿔나가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박민제 기자

◆디스커버리(Discovery) 제도=미국·영국 등에서 재판이 개시되기 전에 당사자 쌍방이 가진 증거와 서류를 서로 공개해 쟁점을 명확히 하는 제도다. 의료기관이나 기업, 국가기관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낼 때 개인인 원고의 증거 확보권을 보장하는 게 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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