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북한 사설

5·24 조치는 북방 진출 가로막는 대못 규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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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시베리아산 유연탄을 실은 중국 화물선이 그제 북한 나진항을 떠나 오늘 새벽 포항에 도착한다. 남북한과 러시아 3국 간 물류협력사업인 나진·하산 프로젝트의 첫 시범사업이다. 이 프로젝트는 북한의 자유무역항인 나진과 러시아의 하산을 잇는 54㎞의 철로를 개보수하고, 나진항 3호 부두를 현대화하는 두 사업을 축으로 하고 있다.

 북한과 러시아는 2008년 합작회사를 설립하고, 공사에 착수해 철로 개보수와 부두 현대화 작업을 최근 완료했다. 5·24 조치 탓에 북한에 직접투자할 길이 막힌 한국 기업들은 북·러 합작회사의 러시아 측 지분 일부를 인수하는 형태로 사업 참여를 추진해 왔다. 간접투자 방식이긴 하지만 현금이 북한에 들어간다는 점에서 5·24 조치 위반 논란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정부가 나진·하산 프로젝트를 5·24 조치의 예외로 인정한 것은 박근혜 대통령이 추진하는 ‘유라시아 이니셔티브’의 간판사업이기도 하지만 한반도의 미래에서 큰 의미를 지닌 사업이라고 보기 때문일 것이다.

 나진·하산 철로는 시베리아횡단철도(TSR)와 바로 연결된다. 부산에서 출발하는 한반도종단철도(TKR)가 나진을 거쳐 TSR과 연결되면 동북아와 유럽을 잇는 ‘철(鐵)의 실크로드’가 현실이 될 수도 있다. 시베리아를 통과하는 철도운송이든, 북극항로를 경유하는 해상운송이든 나진항을 기점으로 하게 되면 동남아와 인도양, 수에즈운하를 통과하는 기존의 해상운송에 비해 30~40%의 운임을 절감할 수 있다. 나진·하산 프로젝트에 이어 한반도를 관통하는 러시아 가스관 사업까지 성사된다면 한반도는 새로운 경제적 도약의 전기를 맞을 수 있다.

 최용해 당비서의 러시아 방문에서 보듯이 북한은 중국 일변도에서 벗어나 러시아에 적극적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이미 북한과 러시아는 250억 달러(약 26조원)를 들여 향후 20년 동안 3200㎞의 북한 철도를 현대화하는 사업에 합의했다. 사업비는 희토류 등 북한산 광물자원을 매각해 충당키로 했다. 현재 북한이 구상 중인 각종 인프라 투자 규모만 270조원에 달한다는 한국건설산업연구원 보고도 있다. 중국에 이어 일본도 시베리아산 천연가스 도입을 위한 가스관 건설 사업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고 있다. 북한과 극동 러시아에서 벌어지고 있는 ‘그레이트 게임’에서 한국만 손 놓고 있는 꼴이다.

 활력을 잃은 한국 경제의 활로는 북방에 있다. 통일에 대비한 큰 그림도 북방을 중심으로 그려야 한다. 하지만 북한을 우회해 북방으로 갈 수는 없다. 북한 진출을 가로막는 대못부터 뽑아야 하는 이유다. 예외적이고, 선별적으로 5·24 조치를 풀어주는 꼼수를 언제까지 계속할 것인가. 5·24 조치를 전면 해제해 국내 기업들의 상상력과 도전정신에 불을 붙여야 한다. 시효를 다한 5·24 조치와 비핵화 우선주의에 사로잡혀 기업들의 대북 진출을 가로막으면서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를 외치는 건 모순이고, 위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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