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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단 P₂대부「젤리」스위스서 잡혀|고관관련 드러나 이 술렁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이탈리아의 보이지 앉는 정부로 군림했던 비밀조직 P2(프로페갠2)의 대부「리치오·젤리」(63)가 지난 13일 스위스경찰에 체포됨으로써 이탈리아는 1년여전의 악몽같은 P2스캔들 제2막을 앞두고 온통 술렁대고 있다.
이탈리아사상 최대의 스캔들로 전국민을 경악시켰던 이 사건은 작년 5월 P2의 비밀회원 9백77명의 명단이 공개된데서 비롯, 그 후유증으로 당시의 「아르날도·포를라니」기민당정부가 퇴진하기까지 했다.
자신의 비밀구좌가 있는 제네바의 한 은행에서 도피1년만에 검거된 「리치오·젤리」는 스캔들이 표면화되기 전에 아르헨티나로 탈출, 그동안 이탈리아 정부의 1급 수배대상자로 경찰의 끈질긴 추적을 받아왔다.
지난 10여년간 이탈리아에서 발생했던 각종 비위사건의 배후 조종자로 지목되고 있는 「젤리」의 수배혐의는 국가전복음모, 간첩(국가 및 군사기밀탐지), 사기, 협박, 명예훼손, 금품갈취, 부정거래, 공문서위조 및 행사 등 다채롭다.
P2회원의 리스트공개로 불붙은 이른바 P2스캔들은 밀라노의 금융재벌로 이탈리아재계를 주름잡던 「로베르트·칼비」가 재산해외도피 혐의로 당국에 붙잡힌 것이 도화선이 됐다.
이탈리아 제1의 민간은행 방코 암브로시아노 은행장으로 2백30억리라를 해외로 빼돌렸던 「칼비」는 행원에서 금융계 거물로 뛰어오른 수수께끼 같은 인물.
그의 배후에 비호세력이 있을 것으로 확신한 수사당국은 주변인물인「리치오·젤리」의 가택수색에서 엄청난 비밀을 캐냈다.
비밀조직 P2회원 전원의 명단을 입수한 것이다. 그 리스트에는 노동상·법상·통산상등 현직각료 3명, 차관급 등 고위관리, 군장성을 포함한 고급장교, 비밀정부기관의 전·현직간부, 대통령실 의전수석, 외교관, 정당간부, 신문사 사장, 대기업사장, 현직의원, 판·검사 등 국가기구 심층부의 핵심멤버들이 망라돼 있었다.
로마의 사업가로 아르헨티나 명예영사를 맡고 있는 인물로만 알려졌던 「젤리」가 이 조직의 두목이란 사실도 드러났다.
문제의 P2는 회원간의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하는 세계적인 비밀결사「프리메이슨」단의 이탈리아본부 산하 5개 조직중의 하나로 2차대전후 창설됐다가 지난75년 네오파시스트의 여러 음모사건 관련혐의가 나타나 강제해산명령을 받았던 터여서 이 조직의 계속적인 암약은 모든 사람을 놀라게 하고도 남았다.
P2는 당초의 설립목적과는 달리 마피아와 흡사한 조직체계를 갖고 이탈리아 각계의 막후 실력단체로 변모, 각종 잇권이나 사건에 개입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P2의 이름은 이 스캔들 이전에도 이미 심심치않게 거론돼 80년8월 85명이 사망한 볼로냐 역 열차폭파사건 등 각종 테러사건 때마다 혐의를 받기도 했다.
비밀회원명단을 손에 쥐게된 당국은 이미 범죄단체로 낙인찍었던 P2의 존속에 긴장, 대대적인 수사를 시작해 이탈리아 각계는 이에 따른 대규모 숙정이 있을 것으로 예상했었다.
의회도 특별조사 위원회를 구성, 독자적인 조사활동을 폈으나 대부분의 명단 관련인사들이 자신의 「무관」을 강력히 주장하는데다 문제해결의 열쇠나 다름없는 「젤리」의 신명을 확보하지 못해 수사는 공전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예상됐던 숙정도, 스캔들의 확대도 없이 사건은 그대로 망각속에 파묻히고 말았다.
이탈리아전국을 막후에서 조종했던 「젤리」는 토스카네에서 출생, 스폐인의 파시스트세력을 돕다가 「뭇솔리니」정권이 무너진 뒤 이탈리아로 귀환했다. 그후 나치의 연락장교로 일한 그는 종전 후 고향에서 철공소를 열어 정착했으나 타고난 야심을 이기지 못해 이를 걷어치우고 불법적인 사업에 손을 댔다.
정치인들의 협조로 아르헨티나·우루과이 등과의 거래에서 재산을 모은 그는 66년 프리메이슨 비밀결사에 투신, 곧「P2」의 핵심간부가 됐고 74년 이 조직의 책임자로 뛰어올랐다.
공산당을 제외한 모든 정당, 정부의 주요부서, 군부 등에 조직을 확대해 나간「젤리」는 「P2」를 자신의 야심 실현을 위한 사조직으로 둔갑시켜 나갔다. 각계각층 인사 5백여명 이상의 각종 비위 및 신상기록을 확보, 이를 협박수단으로 이용해 주요인사들을 손쉽게 포섭했다.
「젤리」의 P2는 철저한 세포조직으로 회원들 서로간에도 조직의 윤곽을 알 수 없도록 만들었다. 신입회원에 대해선 「두목」에 대한 충성의 「증거」를 제시하라고 강요했다. 이름과 소속기관의 각종 비밀을 털어놓게 하는 것이다.
이탈리아와 사우디아라비아 석유공사간의 원유도입제약과 관련한 증수회 사건을 다룬 내각 기밀문서 등 정부·군·재계 등의 극비문서를 이런 방식으로 모조리 확보했다.
정보는 실로 무서운 무기가 아닐수 없다. 그의 개인사무실격이었던 로마의 엑셀시오 호텔의 스위트룸은 그를 「알현」하려는 인사들로 연일 장사진을 이뤘다.
국회의원에 당선하려는 사람, 조카의 병역을 면제받고자하는 사람-모든 청탁이 그에게 몰렸고 그의 입김으로 대부분의 청탁이 이뤄졌다. 「젤리」는 말 그대로 보이지 않는 권력의 심장이었던 셈이다.
한 정치인은 『로마교황이 교황청 실내수영장에서 나체로 수영을 즐기는 사진을 그가 내게 보여주었을 때 나는 그의 실력을 짐작할 수 있었다』고 감탄하기도 했다.
스스로「꼭둑각시의 조종자」라고 불리기를 좋아했던 「젤리」는 언젠가 『나는 군사정부를 세우기 위해 4백명의 고급장교를 포섭했다. 아무래도 군사정부가 공산당정부보다는 낫지 않겠는가』라고 공언하기도 했다. 「젤리」는 스위스경찰에 체포되기 전날 아르헨티나에서 왔다. 6천만∼1억2천만달러로 추정되는 스위스은행 가명구좌가 갑자기 동결된 이유를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당초 스위스당국은 이탈리아의 암브로 시아노 은행의 중남미지점들이 「브루노리지」란 가공인물을 내세워 스위스로 송금한 현금재산이 「젤리」의 불법반출재산이란 단서를 잡아 이를 동결하고 본인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끝내 스위스경찰의 함정에 「젤리」가 걸려든 것이다. 「젤리」의 체포로 이탈리아의 막후 정부로 꼽히는 마피아·카모라 등과 맞먹는 비밀조직 P2를 가려온 신비의 베일이 벗겨질지 실로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이탈리아정부는 금명간 「젤리」의 신병 인도를 스위스정부에 정식 요청할 예정이다. 그가 입을 열 경우 명단에 관계된 인사들에 대한 혐의가 백일하에 드러날테고, 이에 따른 대규모숙청이 전개될 것도 쉽게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파리=주원상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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