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예술계, 안배를 뛰어넘어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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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우리나라에는 민간 문화예술재단이 한심할 정도로 적기 때문에 대부분의 비영리 문화예술활동을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이 지원해 왔다. 30여 년 전 정부 주도로 설립된 이 문화예술진흥원이 이제 곧 민간 자율 기관으로 전환된다. 엊그제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설립과 운영을 위한 11인의 위원 명단이 공표된 것이다. 이는 시민사회.시민문화가 성숙해나가는 과정에서 필연적인 제도 개선이다. '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지 않는다'는 국민의 정부 시절의 모토가 제도로 보장되는 것인 만큼 대다수의 문화예술인들이 경향의 차이를 넘어 이를 반기는 것은 당연하다.

▶ 박찬경 대안공간 풀 디렉터·미술가

이렇게 대의에는 누구나 동의했지만, 걱정이 많았고 여전히 많은 것도 사실이다. 가장 큰 현실적인 우려는 예술계가 심각하게 양분되어 있기 때문에 또다시 진보-보수의 갈등을 반복하거나, 반대로 공평무사한 세력 안배의 정치로 돌아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우려가 현실이 되면, 그나마 이미 상당히 합리화된 지금의 문예진흥원보다도 못한 결과가 된다. 따라서 문화예술위원회의 설립과 지원 과정에서 정치적 안배를 피하고, 안배를 넘어서야 한다. 피하는 정도가 아니라, 처음부터 금기시하고 배격하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이것이 과연 가능할까. 해법은 문화예술계 갈등의 실체를 다시 보는 것에서 출발한다. 사실 지금의 문화예술계는 과거처럼 진보-보수로 명확히 나누어져 있다고 볼 수 없다. 앞에 '한국'이나 '민족'이란 이름이 붙은 대형 단체로만 일별해 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러나 1990년대를 경과하면서 문화예술 활동의 실제 내용을 들여다보면 미학과 이념의 분화가 꾸준히 이루어져 왔다. 진보적 이념의 보수적 예술도 많고, 보수적 이념의 진보적 예술도 많다. 진보-보수의 차이를 예술 활동에 적용하는 기준도 훨씬 유연하고 복잡해졌다. 진보-보수도 물론 존재하지만, 성(性)과 세대, 지역과 계층에 따른 주체와 주제의 분화도 두드러진다. 예술가들은 자신의 이념보다는 편리나 인맥에 따라 단체를 선택하기도 하고, 청년 예술가들은 소속단체에 각별한 관심과 애정이 없는 것이 대세다. 간단히 말해 적어도 의미 있는 예술의 현장에서 사무실과 회원명부 중심의 진보-보수의 대립구도는 낡았다.

보수-진보의 갈등은 문제의 일부일 뿐 핵심이 아니라면, 문제는 다른 데 있다. 진정한 걸림돌은 문제를 낡은 보수-진보의 틀로 일원화해 보는 시선 자체다. 이념적.정치적 힘에 대한 지나친 연민과, 더구나 이를 진정한 좌우 대립으로 오인하려는 태도와도 결별해야 한다. 예술은 치열한 가치경쟁을 통해 성숙하는 것이기 때문에 제한된 창작 수단의 확보를 위해 경쟁하는 것 역시 자연스러운 일이다. 문제는 이것이 예술 외적인 기준에 의해 오랫동안 영향받아 왔다는 데 있다. 예술 외적인 영향이란 간단히 말해 예술계 안팎의 권력, 특히 '일부를 제외한' 대학권력이며, 기득권 주변에 기생해온 예술가.전문인들이 이를 내면화한 것까지를 포함한다. 전혀 고독할 필요도 없고, 어떤 정치상황에서도 사회생활을 너무 잘하는 예술가도 있어왔던 것이다.

문화예술위원회의 새 위원들은 아마도 사회생활에는 능숙하겠지만 적어도 과거를 향한 연민으로부터는 자유로운 분들로 보인다. 이런 구성이라면 한국의 문화예술이 만들어 놓은 새 술을 새 부대에 담을 수 있을 것이다. 새 위원회의 설립은 우리 예술의 총체적인 변화를 재발견하는 지혜에서 비롯될 것이며, 이런 변화된 환경을 십분 활용할 뿐만 아니라, 이를 재촉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소위 '관변문화'를 탈피하는 최종 단계에서 문화예술위원회의 적극적인 역할이다.

박찬경 대안공간 풀 디렉터·미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