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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 기획] 알록달록 컬러리스트의 세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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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은 색을 써야 성공한다(?). 적어도 '컬러리스트'의 세계에서는 이 명제가 참이다. 유독 이 분야에서 여성들의 활동이 두드러진다. 여성이 남성보다 색깔에 민감해서라고? 잘나가는 여성 컬러리스트들에 따르면 그것은 거짓 명제다. 다만 평소 남자들에 비해 색깔 선택이 자유로울 뿐이라는 게 그들의 설명이다. 산업이건 일상이건 디자인 못지않게 색깔의 중요성이 높아진 요즘, Week&이 4인 4색, 여성 컬러리스트들을 만나봤다.

글=김경화 인턴기자 <kim2542@hanmail.net>
사진=권혁재 전문기자<shotgun@joongang.co.kr>

▶ "한국 컬러 앤드 트렌드 센터"의 김소연 실장(左)과 신혜영 이사.

◆ 색을 빚는 아마조네스='한국 컬러 앤드 트렌드 센터'의 직원 16명 중 남성은 4명뿐이다. 앞으로 유행할 색을 미리 예측해 내는 게 이 연구소의 일이다. 여기서도 손꼽히는 '여장부'는 신혜영(41) 비즈니스 이사와 김소연(38) 트렌드 실장이다.

컬러리스트 1세대인 만큼, 이들이 걸어온 길은 평탄치 않았다. 신 이사는 의류직물학을 전공한 뒤 평범한 대기업에 취직했다. 그러나 15년 전, 성차별은 일상이었고 그 때문에 여성이기에 더 잘할 수 있는 일에 늘 목이 말랐다. 그때 계기가 된 것이 한 디자이너의 '컬러 강의'. 색의 매력에 흠뻑 빠진 그에게 마침 기회가 찾아왔다. 트렌드 센터에서 컬러리스트를 모집한 것. 뭘 하는 직업인지도 정확히 모른 채 '감'만으로 무작정 몸을 던졌다.

김 실장도 전공은 섬유예술이었단다. 졸업 후엔 자연스럽게 패션업계에서 진출했다. 잡지에 칼럼을 쓸 정도로 잘나가던 시절. 그러나 전환점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고, 프랑스 유학길에 올랐다. 그때 매달린 공부가 바로 색. 당시로선 큰 모험이었지만 다행히 컬러리스트에 대한 국내 인식이 높아져 센터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컬러 앤드 트렌드 센터는 이들의 활약으로 2003년부터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와 함께 기업들의 컬러 마케팅 실태조사를 벌이고 있다. 해외에 진출한 우리 브랜드의 위상을 높이기 위한 사업이다. 신흥시장인 BRICs(브라질.러시아.인도.중국) 진출을 앞둔 기업들을 상대로 제품에 사용할 색을 제안하는 세미나도 다음달 9일 열 예정이다. 색 하나로 '산업 첨병'의 구실을 톡톡히 해내고 있는 셈이다.

"색은 갈수록 중요한 소비자의 선택 기준이 될 것"이라고 강조하는 신 이사와 김 실장은 "컬러리스트라고 여성이 유리하진 않다. 다만 워낙 여성인력이 많아 성차별이 없는 만큼 공정하게 실력을 겨룰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질 뿐"이라고 입을 모았다.

◆ 여성의 직감이 돈을 벌다=올 초 세계 휴대전화 시장은 '블루블랙폰'이 후끈 달궜다. 상반기에만 국내외에서 500만대가 팔려 약 2조원을 벌어들였다. 이 전화기의 색을 탄생시킨 컬러리스트도 여성이다. 삼성전자 무선디자인팀 컬러 부문의 박지윤(31) 책임디자이너가 그 주인공.

"검정에 파랑 조금 섞은 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냐"라고 할지 모르지만 색의 사소한 차이로도 판매실적은 '천당'과 '지옥'을 오간다. 블루블랙폰이 기획될 당시 주요 시장으로 꼽히던 유럽에서 유행하던 색은 검정이었다. 그러나 검정이 '뜬다'고 해서 그저 까맣기만 한 제품을 내놔서는 차별화가 안 될 터. 지윤씨는 유럽 비즈니스맨들이 선호하는 데다 모기업의 로고도 연상되는 파랑을 섞기로 했다. 그간 경험과 여성으로서의 직감에 귀를 기울인 결과였다.

지윤씨는 대학에서 공업디자인을 전공했다. 그래서 1997년 삼성전자에 입사한 뒤에도 한동안 제품 모양을 디자인하는 일을 했다. 휴대전화의 색보다는 모양에 집중해야 했던 시기였다. 그러나 그는 색에 대한 공부는 게을리하지 않았다. 업무로 바쁜 시간을 쪼개 대학에서 운영하는 색채교육 과정까지 수료하는 '억척'을 보인 것. 회사도 지윤씨의 이런 열정을 높이 사 2001년 업계 최초로 디자인팀에 컬러 부문을 만들면서, 그를 책임디자이너에 앉혔다.

디자인 분야에서 '토종파'로서 보기 드문 성공을 거두고 있는 지윤씨. 그는 "색의 선택은 마케팅 중에서도 감성에 호소하는 분야인 만큼 여성이 더 잘할 수 있는 것 같다"며 "커리어우먼을 꿈꾸는 후배들에게도 컬러리스트를 권하고 싶다"고 말했다.

◆ 품위요? '막노동'인걸요='영화판'도 여성 컬러리스트들의 활동무대에서 빠지지 않는다. 투엘필름의 최수연(32) 실장이 그 '대표선수'. 영화 색채 보정을 전문으로 하는 이 회사에서 최 실장은 촬영된 필름의 색감을 디지털 기술로 조정하는 '디지털 인터미디어트(D.I.)'를 맡고 있다. 대학에서 영상디자인을 공부한 그는 TV 프로그램과 CF 편집 분야에서 10년을 일한 '영상 베테랑'이다.

'한국형 블록버스터'가 많이 늘었다고는 하지만 아직까지는 예산이 빠듯하기만 한 것이 국내 영화제작 환경. 제작 기간도 결코 여유롭지 않다. 이런 까닭에 최 실장의 일도 늘 시간에 쫓기게 마련이다. 지난해 영화 '썸'의 개봉을 앞두고 최 실장은 3~4일씩 밤샘을 해야 했다. 하루 동안 벌어지는 사건을 다룬 스릴러물이다 보니 화면의 색채로 새벽과 저녁 등 시간 흐름을 표현하는 세심한 작업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최근에 개봉한 영화 '태풍 태양' 때도 이런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러다 보니 영화계의 컬러리스트들은 자신들의 일을 "막노동"이라고 부른다. 당연히 체력 면에서 불리한 여성들이 볼멘소리를 할 만한 상황.

그러나 최 실장은 "남성들에 비해 여성들이 더 힘든 것은 사실"이라며 "그렇지만 이 분야에서 더 중요한 것은 체력보다 일에 대한 열정이며. 이것만큼은 자신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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