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근영 기자의 '오늘 미술관'] 슬기와 민, 1997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수리영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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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와 민, `1997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수리영역` 중 `29번`, 2014, 나무에 우레탄 도장과 잉크. 사진=슬기와 민

끝내 도달하지 못한 완전무결한 진공의 세계. ‘수학 포기자’인 제가 수학에 대해 갖고 있는 감각입니다. 입시를 마침과 동시에 수학책을 덮어버렸으니, 이 감각은 이미 화석 상태입니다.

새파란 화면에 ‘29’라는 숫자, 그리고 평평함에 가까운 사선이 하나 죽 올라가고 있습니다. 과연 도약할 수 있을까요.

1997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은 역대 최고로 어려웠던 이른바 ‘불수능’이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수리 29번 문제는 정답률이 0.1%가 채 안 됐습니다. 그래픽 디자이너 듀오 ‘슬기와 민’(최슬기+최성민)은 “정상적으로는 풀 수 없었던” 수학 문제를 시각화해 서로 다른 크기와 색깔의 패널 30개에 옮겼습니다. 가장 어려웠던 29번은 파란 패널, 그나마 쉬웠던 문제는 빨간 패널 하는 식으로 난이도를 색온도로 치환했습니다. 이들은 수학에 관련된 작품 의뢰를 받고는 수능 수리영역을 떠올렸습니다. “거의 모든 한국인에게 ‘수학적 삶’의 절정이자 끝이 되는 100분간의 30문항은 분명한 비장미를 갖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리하여 전시장에 걸린 30개의 색패널은 이 시험을 위해 달려온 ‘수학적 삶들’에 대한 기념비입니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매트릭스: 수학_순수에의 동경과 심연`에 나온 수리 30문제 시리즈의 전시전경. 사진=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2015학년도 수능이 끝났습니다. 아니, 끝나지 않았습니다. 답이 아니라, 문제가 두 개나 틀렸다고 합니다. 완전무결한 진공은커녕, 틀린 문제를 가지고 씨름했을 수험생들을 생각하면 안타깝습니다. 이 작품은 내년 1월 11일까지 서울 삼청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미술관’은 오늘의 우리를 다독이는 그림들로 매주 금요일 독자 여러분께 찾아가겠습니다.

권근영 기자 yo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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