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한 해 3조원 뿌리는 K스트리트…미국 예산 330조 움직인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1975년 청년 변호사가 미국 워싱턴의 한 거리에서 서성거렸다. 일자리를 찾기 위해서였다. 그의 이름은 제럴드 캐시디였다. 당시 그는 코넬대 로스쿨을 졸업한 지 10년도 안 된 변호사였다. 그는 워싱턴 정가의 움직임을 눈여겨 보고 힌트를 얻었다. 로비를 산업으로 본 것이다. 그는 로비 비즈니스에 뛰어 들었다.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 '로비의 시저’로 등극한 그는 현재 메이저 로비회사인 캐시디&ampamp;어소시에츠의 명예회장 자리에 앉아 있다. 청년 캐시디가 39년 전 서성댄 곳은 K스트리트였다. 백악관 배후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길이다.

주변에서는 캐시디를 ‘최고의 총잡이(Hired Top Gun)’라고 불렀다. 고용한 사람의 이익을 위해서 총잡이가 죄책감 없이 방아쇠를 당기듯 로비를 펼쳐서다. 그의 특기는 끼워넣기 예산(Earmark) 따내기다. 끼워넣기 예산은 의회의 쌈짓돈이다. 의회가 입맛대로 프로젝트를 지정해 배정한다.

탐사보도 전문가인 로버트 카이저는 『터무니없는 뭉칫돈(So Damn Much Money)』이란 책에서 “캐시디는 K스트리트 로비스트 가운데 처음으로 끼워넣기 예산을 주목했다”며 “그는 의원들을 설득해 자신의 고객인 기업과 대학 등에 배정하도록 했다”고 설명했다. 이전까지 로비는 연방정부의 인허가를 받아내거나 법규를 바꾸는 게 대부분이었다. 카이저는 “로비를 통해 직접 연방정부 자금을 받을 수 있음을 증명했다”며 “이후 K스트리트의 로비는 하나의 산업으로 성장했다”고 했다.

로비스트가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때는 1930년대 미국 대공황 이후 부터다. 이들은 백악관과 의사당에서 가까운 K스트리트에 모여들었다. 2차 세계대전이후 K스트리트는 세계 로비의 중심이 됐다. 미국이 세계 패권국가로 발돋움한 결과였다. 최근 워싱턴포스트(WP)는 “미국인들이 월스트리트하면 돈을 떠올리고, K스트리트하면 로비를 연상한다”고 했다. K스트리트에는 메이저 로비회사들이 모여 있다. 2010년에 적지잖은 로비회사들이 의사당 주변으로 옮겼지만 K스트리트의 명성은 여전하다. 월스트리트를 떠난 금융회사가 많아도 여전히 월스트리트를 머니센터로 부르듯 K스트리트는 로비 센터다.

미국 정치감시 시민단체인 책임정치센터(CRP)에 따르면 미국 안팎의 기업과 외국 정부, 이익단체 등이 올들어 10월 말까지 미 정부의 예산을 타내거나 법규와 정책를 유리하게 만들기 위해 쓴 돈이 24억1000만 달러(약 2조6500억원)에 이른다. CRP는 “올해도 K스트리트에 뿌려질 각종 로비자금이 30억 달러는 넘을 전망”이라고 밝혔다. 이런 로비 결과 K스트리트를 통해 사실상 배분되는 미 정부 예산은 연간 3000억 달러(약 330조원) 정도라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미국 예산의 10% 수준이고, 한국 예산의 90%나 되는 뭉칫돈이다. 미국 경제정책연구소(CEPR) 공동 대표인 딘 베이커는 “월스트리트에서 돈이 거래되고, K스트리트에선 예산과 법규가 사고 팔린다”며 "W와 K로 시작하는 두 거리가 미국을 사실상 쥐락펴락하는 곳"이라고 설명했다.

K스트리트 전체 매출액(로비자금)은 캐시디가 K스트리트에 처음 진출한 75년 1억 달러 남짓이었다. 반면 2008년 이후 로비자금은 연간 30억 달러 이상이었다. 39년 새에 30배 정도 커진 셈이다. 그 사이 로비스트는 부자가 되려는 젊은이들의 야망을 자극하는 직업이 됐다. 정치전문 매거진인 슬레이트는 “요즘 로비스트 초임은 연 30만~40만 달러(3억3000만~4억4000만원) 정도”라며 “경력이 쌓이면 연봉이 100만 달러를 훌쩍 넘는다”고 보도했다. 캐시디의 지난해 재산은 1억2000만 달러가 넘었다.

K스트리트의 주요 고객은 전세계에 널려 있다. 선진국과 개발도상국뿐 아니라 심지어 옛 소련도 K스트리트를 통해 로비했다. 한 때 식량난을 겪었던 소련은 미국산 밀 수입 쿼터를 확대하기 위해 K스트리트 로비 회사를 고용했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대표적인 예가 70년대 후반에 불거진 코리아게이트다. 게이트의 주역인 박동선씨는 K스트리트 로비스트인 토머스 보그스를 통해 미 정치인들에게 접근해 뇌물을 뿌렸다. K스트리트 2위 로비회사인 스콰이어패턴보그스의 전 회장이었던 보그스는 비록 코리아게이트에 연루됐지만 로비회사를 1인 사무실 수준에서 기업형으로 발전시킨 로비의 혁신가로 불린다.

달이 차면 기우는 법이다. K스트리트도 요즘 들어 조금씩 기울고 있다. 2010년 로비자금이 역사상 최대인 35억5000만 달러 선에 이른 뒤 계속 줄고 있다. 여러 요인이 작용한 탓이다. 정치감시단체 CRP는 “세계경제 둔화 등으로 기업들이 로비 자금을 줄이고 있다”고 분석했다. 여기에다 로비산업을 발전시킨 대가들이 세상을 뜨거나 현장을 떠난 것도 K스트리트에 영향을 주었다. 보그스는 올 9월 숨을 거뒀고, 캐시디는 올 1월 일선에서 은퇴했다.

여기에다 무시할 수 없는 경쟁자가 나타나 K스트리트를 압박하고 있다. 바로 유럽연합(EU) 본부가 있는 벨기에 브뤼셸이다. 글로벌 컨설팅회사인 BCG 파울 뷔르크너 회장은 최근 본지와 인터뷰에서 “EU가 21세기에 가장 막강한 게임 체인저(Game Changer)”라며 “미국과 영국 로비스트들이 브뤼셸로 모여들고 있다”고 말했다.

게임 체인저는 법규나 표준을 바꾸거나 새로 정해 시장의 판도를 바꿀 수 있는 조직이나 기업 등이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요즘 EU 핵심 관계자들이 정보기술(IT) 공룡 구글의 독과점 여부를 문제 삼아 회사 분할 가능성마저 언급하고 있다”고 전했다. 구글이 막대한 자금을 투입해 브뤼셸 로비스트들을 동원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한국 기업들은 그동안 K스트리트에서 소극적이었다.삼성그룹과 현대기아차가 올 들어 쓴 로비자금이 각각 110만 달러와 50만 달러 정도다. 소니와 혼다 등이 쓴 로비자금의 3분의 1도 채 되지 않는 금액이다. K스트리트도 낯선 한국 기업 앞에 브뤼셀이라는 또 하나의 로비시장이 형성되고 있다.

강남규 기자 dismal@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