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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 정치적 재결집 의도"…"노예제 끝났어도 인종차별은 안 끝나"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난 25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도보로 10분 거리에 있는 미국 워싱턴의 펜실베이니아 애비뉴. 흑인 청년 마이클 브라운을 사살한 백인 경관을 불기소한 데 항의하는 시위대가 일제히 길바닥에 드러누웠다. "우리는 잃을 것이 없다"고 외치는 40여명 시위대 대부분은 흑인 젊은이들이었고, 백인은 대여섯명에 불과했다. 마이크를 잡고 시위를 주도한 이들도 흑인이었다.

자신을 흑인 인권운동 단체인 ‘흑인청년계획100’의 간부로 소개한 제시카 피어슨은 “배심원단 12명중 흑인은 3명뿐이었는데 어떻게 평결이 편견 없이 이뤄졌다고 볼 수 있는가”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이틀 전 루돌프 줄리아니 전 뉴욕시장은 TV 방송에서 “흑인들끼리 서로 죽이지 않는다면 백인 경관이 거기에 없었을 것”이라고 백인 경관을 공개 옹호했다.

마이클 브라운이 사망한 미주리주 퍼거슨에서 촉발된 항의 시위는 사흘째인 26일엔 퍼거슨을 비롯해 워싱턴ㆍ뉴욕ㆍ로스앤젤레스(LA) 등 대도시에서 산발적으로 이어졌지만 규모는 줄었다. 하지만 그러한 소강상태의 이면에는 흑과 백이 첨예하게 나뉘는 ‘미국병’이 똬리를 틀고 있다.
뉴욕타임스(NYT)는 이날 “흑인 대통령을 배출하고 흑인 중산층이 만들어진 나라에서 수십 년 전과 똑같이 정의를 놓고 (흑과 백이) 갈라져 있다”고 분석했다. 백인 경관 4명이 흑인 로드니 킹을 무차별 구타해 벌어졌던 1992년 LA 폭동 사태 당시와 다를 게 없다는 얘기다. 오히려 심해졌다. 당시 워싱턴포스트(WP)ㆍABC 여론조사에선 백인 경관들이 무죄 평결을 받은 것을 놓고 흑인 응답자의 92%가 백인 경관들이 ‘유죄’라고 답한 반면 백인 응답자는 64%였다. 22년후 퍼거슨 폭동 사태를 초래한 흑인 청년 총격 사망에 대한 허핑턴포스트ㆍ유거브의 여론조사에선 흑인 중 64%가 총을 쏜 백인 경관을 “처벌해야 한다”고 답한 반면 백인 응답자에선 22%에 불과했다. NYT는 “수십 년에 걸친 법 개정과 법원 판결로 두 인종이 이제 함께 일하고, 함께 스포츠를 하고, 함께 학교를 다니지만 집에 돌아오면 경찰ㆍ법원에 대한 인식과 경험에서 갈라진 세상이 된다”고 보도했다.

NYT에 따르면 2013년말 현재 흑인 남성의 3%가 수감돼 있다. 반면 백인 남성은 0.5%에 불과하다. 이를 놓고 흑인 사회는 법 집행을 놓고 흑백 간에 다른 잣대가 적용된다고 분노한다. 흑인운동가인 달린 가너 목사는 허핑턴포스트 기고문에서 “흑인들은 일상적으로 검문당하고 체포당한다. 인종차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며 “노예제는 끝났다는데 흑인들을 타고난 범죄자로 보는 시선이 계속되는 한 계속 (흑인에 대한) 총격이 이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흑인 청년 케니 와일리(26)는 NYT에 “나는 덴버의 중상류층 거주 지역에서 자랐지만 여전히 나는 (거리에서) 백인들에게 위협으로 간주되곤 한다”고 밝혔다.

반면 세인트루이스의 한 교민은 “이곳의 백인 사회는 대놓고 말은 않지만 법에 따른 결과이니 당연히 따라야 한다는 생각이 절대 다수”라고 전했다. 불기소 결정 후 벌어진 폭동 현장을 보도한 WP 웹사이트엔 “기소로 결정했어도 이를 축하하는 폭동이 벌어졌을 것”이라는 댓글들도 달렸다. 워싱턴의 한 인사는 “퍼거슨 시위를 놓고 백인 주류 사회 일각에선 그간 히스패닉에 밀렸던 흑인 사회가 정치적으로 재결집하기 위한 모멘텀을 만들려 한다는 의구심이 있다”고 밝혔다. 극우 보수단체인 ‘티파티 내이션’은 마이클 브라운의 유족과 함께 한 흑인 운동가인 알 샤프턴 목사 등을 놓고 “이들의 추종 세력은 백인들은 타고난 인종주의자들이자 악이라고 믿는 이들”이라고 강경 비판했다.

흑백의 평행선 속에 퍼거슨 현지 한인단체들은 한인 업소들이 방화와 약탈 등으로 최소 200만 달러의 피해를 본 것으로 추산했다. 외교부는 이날 교민들의 피해 복구와 보상을 위해 영사 조력을 제공하겠다고 밝혔다.

워싱턴=채병건 특파원 mfemc@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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