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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 파일] 200년에 걸친 비련, 그리고 업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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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중국 베이징(北京)에 있는 나비의 날갯짓이 미국 뉴욕에서 폭풍을 일으킬 수 있다는 '나비효과' 이론을 이탈리아 영화 '피오릴레'(19일 서울 시네큐브 개봉.사진)에서 읽었다면 과장일까. 나비효과가 공간의 연관성을 주목한다면 '피오릴레'는 시간의 연속성을 부각한다. 200여 년 전 일어났던 한 작은 사건의 여파가 현재까지 계속된다.

'피오릴레'는 불교의 연(緣)과 업(業)을 연상시킨다. 연과 업은 정보화사회의 용어를 빌리면 네트워크로 번역될 수 있다. 어떤 사물이든 독립 개체로 떨어질 수 없고, 상호 연결망 속에 존재한다는 뜻이다. '피오릴레'는 그 네트워크를 시간으로, 역사로 확장한다.

'꽃의 달' 5월을 뜻하는 제목과 달리 '피오릴레'는 비극적이다. 짙푸른 초원이 시원하게 펼쳐지지만 그 안에서 꽃피는 사랑은 쓰디쓰다. 자유.평등을 추구했던 프랑스 혁명의 영향부터 국가사회주의를 목표했던 파시즘의 그늘까지 이탈리아의 현대사를 바닥에 깔고, 격동의 시대를 살아온 베네데티 가문의 이력서를 거슬러 올라간다. 비극의 씨앗은 돈이다. 1797년 나폴레옹 군대의 금화를 훔친 이탈리아의 한 가난한 농가에 불어닥친 불행이 이후 세대를 거듭하며 반복된다. 영화에선 주로 세 커플이 다뤄진다. 가족의 탐욕 때문에 첫눈에 반한 프랑스 장교를 잃어버린 순박한 처녀의 '보이지 않는' 저주가 후손들에게 대물림된다.

그리고 100여 년 뒤인 20세기 초, 오빠들의 모략으로 연인과 생이별한 이 가문의 처녀는 오빠들에게 독버섯을 먹인다. 또 40년이 흐른 시점. 가문의 저주 받은 전설에 시달리던 젊은이는 체제에 저항하던 연인이 파시스트 군인에게 끌려가는 것을 목격한다. 소극적이나마 체제에 반발했던 그는 부유층 자손이란 '이름값' 때문에 오히려 풀려나는 모순에 직면하고….

20세기 후반 이탈리아 영화계를 대표하는 비토리오 타비아니.파올로 타비아니 형제 감독은 200년이란 짧지 않은 시간 속에 베네데티 일가의 파란만장한 사랑 이야기를 옮겨놓으며 역사와 개인의 함수, 선대의 악업(惡業)이 후대에 미치는 악과(惡果) 등을 다양한 각도에서 돌아보고 있다. 이역만리 외국 집안의 비운이 아닌 바로 내 이웃의 가족사 같은 느낌이다. 우리가 이탈리아보다 심각하게 자본.이념의 갈등에 시달려왔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동시 개봉하는 '로렌조의 밤'은 더욱 피부에 와닿는다. 파시즘이 단말마에 빠졌던 시기, 한 동네 사람들이 황금 들판에서 서로 총부리를 겨누며 생명을 앗는 모습은 50여 년 전 한반도 상황과 다르지 않다. 20세기 지구촌의 공통된 업일까. 타비아니 형제 감독의 보편적 언어가 빛나는 대목이다.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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