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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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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보기

종합 05면

관향인 경주에서 이주, 이 마을에 경주최씨의 뿌리를 내린 인물은 최진립. 그는 임진왜란때 종군, 뒤에 무과에 올랐다. 정유재난때는 권율장군휘하에서 전공을 세웠다. 인조때 공조참판, 전라좌수사를 거쳐 병자호란대 공주영장으로 경기도용인에서 항전하다 전사하니 당시 나이69세었다. 그는 6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이들이 모두 장성, 가문을 번성시킨다.
『12대만석군…경주최부자』의 신화는 바로 이 6형제가 이룩한 것.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는 최진립의7세손이다.
최진립의 13세종손 병민옹(74)의 종가를 찾는다. 3백여평의 넓은 뜰에 아름드리 기둥을 내린 3백년 연륜의 12칸고옥이 명문가의 종가집으로 손색이 없다.
『진립어른은 청백리중의 청백리였제. 또 강직하기로 유명했구먼….』
최병민씨는 신바람이 난듯 선조의 자랑을 늘어놓으며 취재팀을 비장의 서재로 안내한다.
왕이 내린 각종 교지와 교서, 최준립이 휘둘렀던 지휘도(指揮刀), 옥로잠 (玉鷺簪), 벼루 「장와문집」등 30여점의 유물이 옛모습 그대로 보관돼 있는 아늑한 사랑방.
이중 병민씨가 가장 애지중지하는 유물은 병자호란후 인조가 내린 교지. 이 교지에는『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서 공을 세우고 전사한 최진립에게 정무공의 시호를 내리고 병조판서에 추증한다』 는 내용이 적혀있다.
최태진씨 (전경주시장). 최영안씨(재일실업가), 최염씨 (성남종합병원이사장), 최병완 (문교부사무관) 씨등이 이 마을이 배출한 인물들.
『이 고장은 전통적으로 유림세력이 강했제. 조상어른들이 모두 수구파인기라. 일본이 단발령을 내렸을때도 경주최씨 고집은 못꺾었어. 그래서 어른들이 신식교육도 안시켰지.』
최명수노인 (80) 은 이마을 『인물부재의 배경』 을 이렇게 풀이한다. 그러나 명수노인은 『조상의 은덕을 모르는 인물은 결코 큰 인물이 될수없다』 고 못을 박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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