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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 100대 드라마 ④경제] 33. 고금리와의 전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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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물 삽니다. 채권 삽니다.”

광복 후 1970년대 말까지 전국 어디서나 흔히 들을 수 있었던 소리였다. 엿장수들이 고물을 사들이면서 채권까지 수집했다. 그러다 보니 채권 값(채권 금리)이란 게 엿장수 마음대로였다. 액면 단위가 낮은 채권들은 무게를 달아 거래되기도 했다.

그 시절은 그랬다. 금융시장이란 게, 금융회사란 게 정말 보잘것없었다. 은행이 있긴 했지만 정부 통제대로 움직이는 허수아비였다. 정부가 제도 금융권의 돈줄과 금리를 직접 쥐고 흔들어 댄 관치금융 시대였다.

▶ 1983년 명성그룹탈세 사건과 관련돼 검찰에 압수된 채권과 서류들.

40년 전인 65년 은행 예금과 대출 금리는 연 25∼30%를 오르내렸다. 은행 문턱이 너무 높아 개인은 물론 대다수 기업이 사금융에 의존해 필요한 돈을 끌어쓸 수밖에 없었다. 당시 사채금리는 연 50∼60%. 은행 금리의 두 배 수준이었다.

기업들은 생존을 위해 과다한 금융비용과 끊임없이 전쟁을 벌여야 했고, “언제쯤 선진국 수준으로 떨어질까”가 최대 관심사였다. 그러나 2005년 8월, 한국과 미국의 정책금리가 3.25%로 같고, 물가상승률(3.1%선)과 세금을 감안하면 은행에 돈을 맡겨봐야 손해인 실질금리 마이너스 시대가 열렸다. 금리가 너무 낮아 부동산 투기가 만연하니 금리를 올리자는 논쟁까지 벌어지고 있을 정도다.

지난 40년간 고금리와의 전쟁은 처절했다. 자유시장경제에선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도 자주 터졌다. 대표적인 게 ‘8·3 사채동결 조치’다. 70년대 초 기업들은 “살인적인 고금리 때문에 다 죽게 생겼다”며 정부에 특단의 대책을 요청했다. 박정희 정권은 재계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정부는 72년 8월 2일 오후 11시40분, “기업들이 안고 있는 사채를 일정 기간 갚지않아도 되며(3년 거치 5년 분할상환), 금리도 시중 실세금리의 4분의 1수준인 월 1.35%만 내도록 한다”는 ‘대통령 긴급명령’을 전격 발표했다. 세상이 발칵 뒤집혔고 돈 가진 사람들은 혼비백산하는 일이 벌어졌다.

정부는 아울러 사금융을 양성화하겠다며 ‘단기금융업법’‘상호신용금고법’‘신용협동조합법’ 등 3개의 법을 만들었다. 단자회사(나중에 종금사로 전환)와 신용금고·신협 등이 탄생한 배경이다.

그러나 만성적인 자금 부족과 공금리 통제가 이어지는 상황에서 사금융은 다시 활개쳤고 82년 희대의 금융 사기사건이 벌어졌다. ‘장영자·이철희 거액 어음 사기사건’이 터진 것이다. 이들은 최고 권력층과의 끈을 과시하며 무려 7000억원 규모의 어음 사기극을 벌였다. 83년에는 김철호 사건이 터져 또 한바탕 세상을 뒤흔들었다. 명성그룹 김철호 회장의 부탁을 받은 상업은행 혜화동 지점의 김동겸 대리가 수기통장을 발행해 1000여억원 규모의 사채놀이를 하다 덜미가 잡힌 사건이었다.

하지만 경제가 발전하면서 금융자율화와 금리자유화의 대세를 거스를 순 없었다. 정부는 91년 ‘4단계 금리자유화 계획’을 발표했고, 93년엔 금융실명제를 전격 단행했다. 97년 외환위기를 계기로 금리는 완전히 시장에 맡겨지게 됐다. 외환위기는 국내 금융산업의 지형을 완전히 뒤바꿔 놓았다. 97년 16개였던 시중은행은 현재 8개로 줄었으며, 이 중 3개는 외국계로 넘어갔다. 한때 30개에 달했던 종금사는 현재 단 2개만 남아 있을 뿐이다.

김광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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