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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강의하다 신문소실 쓴게 인연…쟁화사건후 작가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0면

나의 작가생활은 좀 특이한 경험에서 시작됐다. 자의에 의한 선택이었다기 보다는 타의에 가까운 것이었기 때문이다.
작가에로의 선택은 나의 일생에 두번씩 주어졌는데 첫번째는 주위 친구들의 권유와 모험이 담긴 시도였고두 번째는 당시 상황이 작가의 좁은길로 나를 밀어넣었다.
나의 처녀작은 부산일보에 연재된 장편소설「내일없는 그날」이었다.
55년 당시 30대이던 나는 경남대에서 철학과 불어를 강의하고 있었는데 부산일보에 가끔 잡문을 쓴 인연으로『소설을 써보지 앉겠느냐』는 제의를 받았다. 당시 대부분의 지방에서는 서울작가들에게 연재소설을 청탁했는데 거의 힘을 빼고 쓰는 상황, 도피적인 소설류가 많으니 자유당치하에서 6·25의 참상을 겪고난 지식인들의 실의에 빠진 모습을 그려달라는 것이었다.
부산일보로서는 내가 무경험자였기 때문에 분명 투기에 가까운 모험이었고 나에게는 새로운 세계로의 도전이자 시도였다.
지금 생각하면 전혀 문외한이었던 내가 연재소실을 쓴것은 모골이 송연한 일이지만 희한하게도「내일없은 그날」은 장안의 화제가 됐고 공전의 성공을 거둬 나를 놀라게 했다. 그래도 나는 내가 작가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후「내일없는 그날」은 단행본으로까지 출판됐으나 나는 신문사논설위원으로 직장을 옮기게돼 바쁜 일손으로 소설에서 손을 뗐다.
5·16군사혁명이 나자 나는 필화사건으로 형무소신세를 지게됐다. 2년7개월간의 복역생활중에도 출감후 작가가 되리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형무소 문을 나서고보니 마땅히 할일이 없었다.
소설을 쓴다는것이 당시로선 나에게 주어진 유일한 선택이었다. 타의에 의한 선택.
64년 43세였던 나는 소설 「알렉산드리아」를 탈고, 출판했다. 만9년전「내일 없은 그낱」을 연재했을때와는 전혀 입장이 달랐다.
「내일없은 그날」이 9년후 「알렉산드리아」를 예견하는 시도였다면 「알렉산드리아」는 본격적인 작가에로의 궤도수정이었기 때문이다.
40대에 탈바꿈을 한지 18년이 지난 오늘 나는 나에게 주어진 선택이 천직임을 알고 하루 하루를 작가로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 이병주 (61·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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