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본말 찌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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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자신의 언어를 아끼고 가꿀 줄 모르는 민족은 망합니다. 근 3백년 중국대륙을 지배해온 만주족이 나라도 없이 망한 것은 제 말을 잃고 한족에 동화돼버렸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주위를 보면 마치 만주족의 전철이라도 밟으려는 것 같아 무섭습니다.』
한글학자 한갑수씨(70)는 우리의 언어생활을 개탄하면서 시급한 대책을 호소했다. 알게 모르게 어색한 외래어를 섞어 써야 유식한 것처럼 아는 우리의 언어풍토는 하루 빨리 시정돼야한다는 것이다.

<만주족 커다란 교훈>
『특히 일본어 흉내는 일제통치의 치욕적인 역사를 청산하고 민족적 자존심을 되찾기 위해서도 그 찌꺼기를 용감하게 씻어내야 합니다.』 한씨는 우리사회에서 흔히 쓰이는 일본어의 잔재를 4가지 유형으로 분류하면서 「광복37년」에 정신적 광복은 아직도 요원하다고 했다.
흔히 쓰는 일본말 가운데 첫째유형은 학문 또는 기술용어다. 「정치」가 그렇고 「경제」·「철학」·「기차」·「자동차」·「식도락」등의 용어가 그렇다. 이 가운데 철학·식도락은 순전히 일본인이 만들어낸 용어지만 이밖의 용어는 일본어가 침투하기 이전부터 한자식으로 된 우리말이 있었다. 정사(정치), 경국제세(경제)·화차(기차)·기차(자동차)가 그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이같은 말은 중국에서도 일본어를 그대로 쓸 정도로 굳어졌고 일반화돼 거부반응 없이 우리도 쓸 수 있는 것들이다.
우리주위에서 언어생활을 더럽히는 일어잔재에는 또 다른 3가지 유형이 있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그 첫째가 몰라서 쓰는 잔재다. 가정에서도 흔히 쓰는 네지마와시(나사틀개), 미장원에서 활개치는 후까시(부풀머리), 고데(인두머리), 우찌마끼(안말이), 소또마끼(밖말이)등이 그것이다. 음식점에 들어가서 식사를 잘하고 난 뒤 이쑤시개를 달라면 촌스럽게 생각하고 요오지(양기)를 달라고 해야 유식해진 듯 착각한다.
남의 물건을 가로채는 행위를 일제가 남겨놓은 말인지도 모르고 네다바이(강청배)라고 천연덕스럽게 말한다. 한씨는 『이런 종류의 말을 50대이상의 사람들이 쓰는 것은 그 사람들의 정신상태가 잘못 됐다고 하겠지만, 그밖의 젊은이들은 모르고 쓰는 것이 대부분으로, 이는 선배들의 책임』이라고 했다.

<마치 학식자랑 하듯>
『흔히 사람들은 「일응」(일응)이란 말을 대화중에 씁니다. 제법 유식한 체 행세하는 사람들이 자주 쓰는 말인데 나는 이 말을 「장차관 용어」라고 부릅니다. 장차관급 세대가 많이 쓰는 말인데 우리말로도 「우선」 「덮어놓고」「짐짓」등 좋은 말이 많은데 이를 굳이 쓰는걸 들으면 구역질이 납니다.』 한씨는 우리말을 오염시키고 있는 일본어의 찌꺼기 청산에 선배들의 책임이 무겁다고 했다.
정가에서 흔히 쓰이는 「사꾸라」는 물건을 경매할 때 파는 사람쪽이면서 응찰자로 위장하고 값을 올리는 사람을 뜻하는 일본어다. 그런 뜻을 지닌 우리의 고유어로는 「검정새치」란 말이 있다. 그런데도 이말 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검정새치는 검정머리에 돋아난 흰머리를 뜻하는 「새치」란 말에다 검정색깔을 붙여 만든 말로 우리조상들의 재치가 엿보이는 고유어입니다. 그런데 이런 말을 우리말 사전에서도 빼버렸어요. 우리말의 소중함을 모르는 선배들의 과오가 결국 우리의 언어생활을 이렇게 만들었읍니다.』 한씨는 자신도 무거운 책임을 느낀다고 했다.
둘째유형은 알면서도 버릇이 돼 쓰고있는 잔재다. 건축공사장에서는 1자5치면 될 것을 「잇샤꾸 고승」이라고 해야 속이 풀리고 음식점에 들어가면 가락국수는 「우동」, 초밥은 「스시」다. 「덴소」라는 음식도 있다. 「덴뿌라 소바」(튀김국수)의 준말이다. 「불백」·「갈곰」은 뭔가. 불고기백반·갈비곰탕을 일컫는 일본식준말 사용법이다.
물수건을 「시보리」로 쓰고 전구를 굳이「다마」라고 부르는 것도 그렇지만 건축업자들은 모래나 흙의 양을 말할 때 꼭 「류베」라고 한다. 입방m(입방미)의 준말 「입미」의 일본식 발음이다. 이런 유형의 용어는 각분야의 기능사들 사이에 아직도 그대로 살아움직이고 있다.
세째유형은 외래어의 일본식발음과 사용법이다. 자동차의 브레이크는 「부레끼」로 쓰는 것이 자연스러울 정도로 돼있고, 운전중 차를 뒤로 물릴 때는 백 대신 「빠꾸·오라이」다. 「밧떼리」(배터리)·「쪼꼬레또」(초컬릿)·「보당」(버튼)은 그렇다 치고 「루저벨트」를 「루즈벨트」로, 「케너디」를 「케네디」로 남의 이름까지 바꿔놓고 있는 일인의 왜곡을 우리는 왜곡인줄도 모르고 그대로 따라쓰고 있는 것이다.
『2백11개의 음절밖에 갖지 못한 일본인이 원음을 발음할 수 없어 만들어놓은 말을 1천9백50개의 음절을 갖고 풍부한 발음이 가능한 우리가 받아서 쓰는 것은 한심한 일입니다.』 한씨는 외래어를 쓰는 것까지는 불가피할 경우면 이해할 수 있지만 일본식 외래어는 민족의 자존심이 용납될 수 없는 문제라고 했다.
『어떤 자리를 막론하고 대화중에 일어를 쓰는 사람을 만나면 나는 그 자리에서 설교를 합니다. 말을 잃으면 사상을 잃고, 사상이 없으면 문화가 있을 수 없읍니다. 문화가 없는 민족이 어떻게 국가를 가질 수 있겠읍니까.』 한씨는 우리말을 두고 일본어를 지껄이는 사람은 나라를 일본에 바치자는 것과 다름없다고 흥분했다.

<프랑스에서 배워라>
『대학다닐 때인 23년, 나는 만주어를 채집하기 위해 간 일이 있읍니다. 그런데 대제국을 건설했던 그들의 말이 없어요. 16개월동안 헤매면서 촌로들을 만나 겨우 2백여개를 수집할 수 있었지만 결국 중국에 말을 전부 뺐긴 그들은 2차대전이 끝나고 모두가 독립국가를 선언할 때 「우리는 독립국이다」란 말 한마디를 할수 없어 나라가 없어졌읍니다.』 한씨는 말을 뺏긴 나라는 반드시 망하고 만다고 다시 한번 강조했다.
프랑스의 드골이 EC(구주공동체)가입을 꺼리고 경제적 손해를 보면서도 프랑스어를 지키려했던 정신은 높이 사야한다고 지적한 한씨는 일어의 잔재는 행정력을 동원해서라도 하루빨리 청산하지 않으면 모르는 사이 일본에 당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권순용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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