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옆골목「런던」영국을 떠나면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0면

기자가 영국에 도착한것이 77년11월이었으니 정확하게 4년9개월동안 주영특파원생활을 한셈이다. 이 기간은 학생으로 치면 대학과정을 마치고 갓직장에 들어갈수 있는 시간이고 서당개로 치면 천자문정도는 읽을 수 있을 법한 시간이다.
이 짧지않은 시간에 기자는 영국뿐아니라 동서아프리카의 6개국을 비롯, 중동의 6개나라와 대부분의 유럽나라들을 방문할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대개가 사건을 쫓아다니는 주마간산격의 짧은 방문이었기는 하지만 제1세계와 제3세계를 넘나드는 행위는 늘 충격을 느끼게 했다.
가봉·터키·이란의 촌락에서 20년전쯤 한국의 촌락에서 본것과 같은 가난과 인정을 체험하고 곧 런던에 돌아올때 거기에는 한국이 아직 도달하지 않은 미래의 어떤 사회상태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때로 제3세계에 출장갔다 련던에 돌아올때는 마치 신비로운 타임머신을 타고 20년전의 한국을 다녀와서 다시 20년후의 한국으로 들어서는 듯한 착각조차 느낄때가 있었다.
한국이 뒤로 두고온 열반화된 빈곤과 구수한 인정이 균형을 이루고있는 산업화이전의 세계는 아직도 터키·이집트·팔레스타인등 기자가 방문한 제3세계의 현장에 그대로 남아있다.
아프리카에서는 아직도 방망이로 옷을 두둘겨 세탁하는 모습을 보았고 팔레스타인에서는 염소똥을 말려 빵굽는 연료로 쓰는것을 보았다. 석유부국이라는 이란에서는 그무더위에 양고기를 파리떼 득실거리는 노점에 내놓고 팔고 있었고 터키에서는 신혼부부가 방을 마련하지 못해 별거를 하고있다고 불평하는 소리를 들었다.
카이로시내에는 집이 없어 묘지를 주거로 삼고 있는 주민이 있고 아프리카에서는 20대의 건장한 청년들이 일자리가 없어 가정집 식모노릇을 하고 있는 모습도 보았다.
그런 처절한 빈곤의 증상들을 대할때마다 고통스럽기는 해도 「보릿고개」를 없애준 지난 2O년동안의 한국경제성장이 다행하게 느껴졌다. 이들 제3세계 사람들도 한국의 경제성장을 부럽게 생각하고 있었고 자기들도 그 정도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여러번 들었다.
그러나 그런 가난의 증상과 함께 제3세계에는 20년전쯤 한국의 촌락에서 맛볼수 있었던 훈훈한 인간관계가 공존하고 있다.
외국에 나온 이래 낯선 사람에게서 식사대접을 받은것은 여러번 있었지만 모두 제3세계에서였다. 한달이면 보름동안은 점심식사를 외상으로 .먹는다는 터키의 한 가난한 국민학교 교사로부터 대접받은 싸구려 점심식사와, 그와 나눈 훈훈한 대화를 잊을수 없다.
이란국경을 넘어올때에는 쿠웨이트에서 노동하다 귀국하는 이란사람들이 낯선 황색인에게 식사를 권했다. 식사래야 계란구운겻 하나와 엷은 빵 한조각에 날양파 한덩어리였지만 고향인심을 생각케 해주는 따뜻한 대접으로 기억하고 있다.
이런것이 두드러지게 느껴지는 이유는 영국에서 본 인간관계의 삭막함때문이다.
영국에서는 서로 아는 사람꺼리도 대접을 받으려면 몇곱절 대접하지 않으면 안된다. 몇곱절을 해도 외국인일 경우 아예 답례를 않는 예가 허다하다.
영국국민의 90%이상이 고향이 없다. 그래서 성주 정도가 아니면 고향이란 개념조차 이해하지 못한다. 산업화과정에서 대대로 다른지역을 전전하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지연이 없듯 혈연도 사라져 가고있다.
이혼율이 높아져서 결혼하는 순간부터 부부관계는 잠재적 이혼소송대상이란 의식으로 흐려지게 된다. 부모는 실직한 자식의 실직수당중 대부분을 자식의 주거비조로 받아낸다. 18세만 되면 부모·자식관계는 실질적으로 끊어진다.
어느 결혼 피로연에 갔을때 신랑·신부의 조부모가 상석에 앉지않고 일반하객들과 함께 앉아 식사하는 것을 본적이 있다. 조부모는 소개도되지않았다. 왜그러느냐니까 이상한질문을 한다는듯 당사자들은 원래그런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인간관계를 보면 영국의 고사제도란 지배층의 선의에 의해서라기보다 절박한 사회적 필요에서 생겨났다고 볼수있다.
옷깃을 스쳐도 인연이란 말이 우리에게는 있지만 영국인들은 옷깃을 스치면 크게 불쾌해한다.
말로야『실례했습니다』라지만 실은 철저한 혐오감의 표정을 짓는다.
현대화·도시화·형식화는 필연적으로 인간을 개인주의적으로, 이기적으로 만드는 것인지,서양전통자체에서 그런 속성이 나오는지는 알수 없지만 제3세계와 제1세계의 중간지점에서 엉거주춤하고 있는 한국은 현대화라는 것을 서구화의 모델을 통째로 받아들이는 쪽으로만 가야하는지 아니면 다른길도 있는지 타임머신의 충격을 받을때마다 생각하게한다.
영국을 떠나면서 산전의 아름다움은 흐뭇한 기억으로 남지만「소시얼·다위니즘」의 원리가 철저히지배하는 인간관계의 분위기는 다시 겪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끝>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