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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육신 명학자 낸 절의 집안|전국에 12만여명…23∼35순으로 48위|선각자 유길준등 숱한 인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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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간밤에 부던 바람 눈서리 치단말가/낙낙장송 다 기울어 지단말가/하물며 못다 핀 꽃이야 일러 무삼하리오.
절의의 상징인 충목공 유응부 장군은 기계인을 대표한다. 그는 유명한 사육신의 한사람이다.
일찌기 무과에 급제, 첨지중추원장, 평안도절제사를 지내고 1455년 정고에 올랐다.
같은해 성삼문 박팽년등과 단종 복위를 모의하고 명나라 사신올 초대하는 연회장소에서 세조를 살해하는 소임까지 말았으나 김찬의 배신으로 탄로되어 심한 고문을 당했으나 끝까지 지조를 꺾지 않다 숨을 거두었다.
세조가 육신을 친국할때 장군에게 『너는 무엇을 하려 했느냐』고 물으니 그는『한칼로 촉하(세조를 가리킴)를 죽이고 본임금을 복위시키려 했다』고 대답했다.
세조가 노하여 살가죽을 벗기고 부젓가락으로 살을 지지는 고문을 내렸으나 얼굴빛 하나 변치않고 부젓가락이 식으면 『다시 달구어 오라』고 호통치며 끝내 굴복치 않았다.
학문과 무예를 겸비한 당시 절의학자로 기골이 장대하고 활쏘기에 뛰어났으며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했다고 기록은 전한다.

<청렴결백한 재상>
벼슬이 재상의 반열에 이르러서도 청렴결백하여 항상 가난을 동반했고 때로는 먹을 양식조차 끼니대기가 어려웠다. 그가 죽던날 가족들은 『살아서 편히 산적이 없고 죽어서 대와를 남겼다』 고 회고했다는 것이다. 숙종때 빈조관서에 추종되고 과천 낙절서원, 대구 낙빈서원, 영월 창렬사에 제향되니 오늘날에도 그의 뜻을 기리는 후손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유씨인구는 2만4백42가구(작년 국세조사)에 12만여명으로 성별 인구순위는 제3위.
시조 삼재는 신라때 아손을 지냈다. 그후 의신이 신라조를 무너뜨린 고려초에 불복하므로 태조가 기계현(경주의 속현) 호장으로 복속케하여 후손들이 그곳에 세거하고 본관을 기계로 하였다.
이밖에 창원 인동 장사 고영등 여러본이 있으나 모두가 유삼재를 학파로 하는 동원분파로 알려져 있으며 이중 기계가 대종으로 유씨의 30%를 차지하고 있다.
충목공과 같은 시대의 인물로 유효통이 빛난다. 세종때의 의학자로 1431년 전의감정 노중례와 함께 『향과채집월령』을 저술했다. 이 책은 우리나라에서 약용식물을 맨 처음 정리한 의서로 식물이름을 우리말로 기입함으로써 일상에 알고있는 식물을 약으로 손쉽게 쓸 수 있도록 했다.
기계 유씨의 송흥조는 정당 유여림(1476∼1538). 연산군대에 문과에 급제, 예문관 검열로 시작하여 벼술이 예조판서에 이르렀으나 천성이 담백하고 부귀영화를 꺼려 7년간 향리에 은둔하기도 했다. 이조중기에 이름을 바꾼 기계인은 거의가 그의 후손.
대자항렬에서 좌의정 유홍의 아들 대건·대진·대일 형제들이 선조조에 벼슬을 했고 그 아랫대에서 대일의 아들 백습(충경공)이 인조반정에 공을 세워 대사간까지 역임했다. 시남 유계(1607∼1664)는 김상혜·김장생 문하의 성리학자로 비론에 정통했다. 도덕·절의·문장에 뛰어나 생전에 『가례원류』를 지었으며 이 책은 그가 죽은지 50년이 지난 뒤에 노·소론사이에 치열한 당쟁을 벌였던 씨앗이 되었다.
어쨌든 기오 유씨는 중흥조 여림의 충손 대자항렬에서 시작하여 그 아래로 자·목변자에이어 명·기·언자 항렬의 후손들이 숙종∼정조대에 최성기를 누렸다.
그뒤 한말에 이르기까지 숱한 학자와 문인들이 쏟아져 나왔으니 예서의 대가 유한지, 순조때 당대의 문장가 유한준, 성리학의 대가로 김윤식·남정철 등올 길러낸 유신환이 돋보이며 서예가로 특히 초서에 뛰어나 「초성」이라 일컬어졌던 유창환 등은 대표적 인물이다.
시대를 구분하여 이조의 거목을 유응부 장군이라 하면 한말의 큰별로 『서유견문』의 집필자 구당 유길준을 들 수 있다.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풍운이 소용돌이치던 조선말기 이땅의 선각자로 미국유학생 1호를 기록한 것이 유길준이었다.
그는 갑오경강 후 김홍집 내각의 내부대신을 지내면서 옴력폐지, 종두법시행, 우편제도 실시, 단발령 등 개혁정책을 수립했다.

<일본인도 기계 유씨>
그 뒤 아관파천으로 내각이 붕괴되자 일본으로 망명했다가 1907년 순종의 특사령으로 귀국, 흥사단에 참여, 국민경제회를 창립했고 교육제를 조직, 계산학교를 설립했다.
유길준이 선진적 사상과 교육에 심취한 것은 1881년 신사유람단을 따라 일본에 건너가 경응의지에 입학하면서부터 였다.
그러나 그는 서울에 들어서자마자 당시의 보수정권에 의해 체포되어 포장 한규설의 집에 유폐되었다. 6개월을 이곳에 있다가 다시 백녹동(가회동)으로 옮기어 이곳에서 구인생활하기 6년.
이 울분에 차고 암울했던 시절에 벽지를 뜯어가며 저술한 것이『서유견문』이었다.
그의 장손 병덕씨는『언제나 충직하고 청빈하라고 밤낮으로 일렀으며 더럽게 부자가 되는 것보다 깨끗이 살며 빈자가 되는 것이 좋다고 한 길낙할아버지의 말씀이 지금껏 가훈이 되고 있다』고 했다.
유길로에서 한획을 긋고 근세에 이르러서는 현민 유진오박사가 한자리를 차지한다. 현재 활동적인 공직에서 물러났지만 얼마전까지도 그는 교육계·정계의 거목이었다.
대한민국 전국헌법과 정부조직법을 기초한 헌법학의 태두이기도 한 현민은 20년대 후반기부터 해방직전까지의 격동기문학을 설명하는 자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그의 작가생활은 20년이 채 안되고 해방 후에는 대학교수·명문사립대학의 총장, 그리고 정치가로서의 이미지가 더 컸지만 한국문학사에 있어서 동반작가시대,l순수문학시대, 조선문인협회시대를 거치면서 낸 『김강사와 T교수』 『창낭정기』 『화상보』 『붐』 『나비』 등은 주옥같은 작품으로 기록되고있다.
관계에서 기계유씨는 유상근씨(전 통일원장관·현 명지학원이사장) 유완창씨(전 보건부장관) 등 2명의 장관을 냈으며 유영준·유진령·유호직·유승준씨 등이 국회의원을 지냈다.
영화『오발탄』 『잉여인간』의 감독 유영목씨는 문예영화의 거장으로 서울시문화상·대한만국 문화예술상을 수상했다.
방송작가 유호씨는 40대에게 아직도 기억되는 『똘똘이의 모험』을 비롯, 『길잃은 철새』 『우리아빠 최고』 『서울야곡』등 드라머를 통해 서민들의 애환을 그린 인기작가. 소위 「유호극장」으로 방송가의 영광을 차지했다. <글·고정웅기자 사진·김택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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