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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은 일본인|우리가 우리를 존경 않으면 일인이 우리를 존경할 리가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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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결국 이렇게 끝나고 말았다. 처음부터 누가 이기고 누가 지는 게임이 아니었다.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시비를 무슨 씨름판쯤으로 생각했다면 오해다. 문제는 그런 차원이 아니었다.
우리는 온 세계가 다 아는 사실을 사실대로 기술하라는 것이었고, 일본은 그대로 하면 끝날 시비였다. 결말은 너무도 분명하다.
그런 문제를 놓고 일본은 무덤을 헤쳐 볼일도, 문서를 뒤적일 일도 아닌 것을 몇 달, 며칠을 두고 요설만 일삼아 왔다.
결국 일본정부의 공식 견해라는 것을 보면 일본은 그동안의 역사시비를 씨름판으로 생각한 인상이 역연하다. 한마디로 왜곡은 인정하나, 시정의 시기는 우리 손에 맡겨 달라는 얘기다. 문안부터 마치 해어진 양복을 짜깁기하듯 올과 날을 여며 매끈하게 해놓았다.
새삼「일본은 일본」이라는 생각이 든다. 일본사람에게 일본사람 아니기를 기대하는 것 부터 무리지만, 굳이 그처럼 포장술에 신경을 쓸게 뭐냐는 말이다.
일본측의 정부견해에는 이번에도 또 「반성문」이 들어있다. 『과거의 관계를 유감으로 깊이 반성한다』는 예의 문구. 이 말의 비중은 더도 말고 국교 정상화이후 17년 간의 한일관계를 저울에 달아보면 쉽사리 짐작할 수 있다.
일본은 또 향후 2년은 문제의 교과서를 그대로 쓸 것이라고 했다. 그 동안의 일본학생들은 「진실 아닌 진실」을 진실로 배워도 좋다는 뜻인가.
물론 현장교육을 맡은 교사들에게 미리 한일공동 코뮈니케의 정신을 주지시키겠다는 경과조치는 두고 있다. 하지만 이것 또한 낯간지러운 일이다. 그래 일본의 역사교사들은『교과서에 씌어있는 내용은 거짓이니 믿지 말라』고 학생들에게 가르치겠다는 말인가.
놀라운 것은 일본정부가 그런 말을 거리낌 없이 발표문서에 적어 넣고 있는 사실이다. 일본국민들에게 미리 뭐라고 귀엣말이라도 해둔 것처럼.
이런 사실 하나로 미루어 보아도 결국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은 일본국민 모두의 음모나 묵계가 부지불식간에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우리를 불쾌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그 점이었다. 일본인의 보이지 않는 음산한 심리상태. 이념적으로는 군국주의에의 회귀라고 할 수도 있으며, 정치적으로는 국제사회에서의 우월감의 과시랄 수도 있고, 심정적으로는 「조선인」이라는 미묘한 준재의식 일수도 있다. 아니면 그 전부의 복합일 수도 있다.
어느 편이든 우리의 불쾌감을 자극하기는 마찬가지다. 또 이것은 교과서 속의 문구를 몇 군데 뒤집는 일쯤으로 해결될 일도 아니다. 백의 하나라도 우려가 그런 단순한 기대를 갖고 있었다면 천만의 말씀이다. 장차 더 큰 파국과 수회가 없으라는 보장이 없다.
그런 관점에서 판단하면 일본역사교과서 문제는 그림자에 불과하다. 문제는 그런 그림자를 던져주는 실체가 무엇이냐에 있다.
우리는 그림자에 놀란 나머지 실체를 못 보는 우는 범하지 말아야한다.
1964년 동경올림픽 때의 일이다. 프랑스의 올림픽 선수들은 공항에 도착하자 일본관계자들이 내놓은 올림픽 팜플렛을 거부했다.
영어로 인쇄되어 있다는 것이다. 불어도 엄연히 국제어인데 왜 불어 팜플렛을 준비하지 않았느냐는 항의였다.
일본사람들은 부랴부랴 불어 판을 따로 만들어 돌렸다. 국제올림픽 규정에도 없는 특별 호의를 보여준 것이다.
이것은 한 작은 해프닝으로 웃어넘길 일 같지만 일본국민의 심리를 분석하는데는 하나의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상대가 강한 프랑스였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우리는 이번 일본교과서 왜곡문제를 통해 얻은 것이 많다. 역설 같지만 그것은 사실이다. 우리에게 일본은 어떤 의미를 갖는 나라인가를 새삼 일깨워 준 것이다. 두려워 해야할 것은 일본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나는 최근 어느 교사로부터 이런 말을 듣고 섬뜩했던 기억이 난다. 한 신문에 실린 일제시대의 살육광경을 보고있던 어느 국민교생이 교사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선생님, 이 사람은 왜 가만히 앉아 있어요?』 「이 사람」이란 일본헌병의 칼 앞에 앉아있는 한복 입은 한국인. 바로「이 사람」의 참담했을 심정을 모를 우리가 아니다. 땅이 꺼지게, 하늘이 무너지게 절규하고 반항하고 싶었을 것이다. 우리역사의 아침을 열어준 3·1만세도 그런 몸부림과 각성의 소산이었다.
그러나 오늘의 철부지들에겐 우리의 선조들이 가만히 앉아서 칼을 기다리는 모습으로 비친 것이다.
우리는 오늘의 분노와 항변으로 일본인의 혀를 움직이게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일본의 만용을 움직이게 할 수는 없다. 민족의 현실, 나라의 현실처럼 차갑고 무서운 것은 없다. 그것은 김포공항을 떠나 한시간이면 느끼고 보는 일이다.
내가나를 존경하려하지 않는데 누가 나를 존경해 줄 것인가. 우리가 일본인을 마음으로 설복 시킬 수 있는 길은 멀리에 있지 않다. 스스로 긍지를 갖는 일이다.
우리의 긍지는 역사 속에도 있고, 우리의 노력과 결단 속에도 있다. 역사 속의 긍지는 갈고 닦아야 한다. 우리는 싫으나 좋으나 5천년의 역사를 지켜온 민족이다. 비록 오늘 국토는 양분되었으나 민족은 결코 파감 하지 않았다. 그 하나의 사실만으로 우리는 스스로 「강인한 민족」, 「망하지 않는 민족」의 용기와 긍지를 찾을 수 있다.
우리는 고대사를 통해 독창적인 문화의 수출국이었다. 일본은 스스로도 그것을 인정한다. 실제로 이런 사실들은 오늘의 진지한 사학자들에 의해 끊임없이 연구되고, 값있는 저술로서도 출간되고 있다. 김석형 저『고대 조일 관계』(일어판)는 한 예의 저작이다.
이런 말은 자칫하면 감상이나 자아도취로 들리기 쉽다. 그러나 그런 얘기가 아니다. 우리는 「우월한 나라」가 될 수 있다는 역사적 증명서를 갖고 있으며, 잠재력을 함축하고 있다. 옛날에 가능한 일이 지금에 불가능하다면 문제는 지금에 있다. 사학자들의 분발이 요구되는 소이도 여기에 있다.
그것은 쉽고도 어려운 일이다. 쉽다는 뜻은 우리의 역사를 음미하며 마음의 다짐을 새롭게 할 때 갖게 되는 생각이며, 「어렵다」는 뜻은 그동안의 우리 주변을 돌아보면 새삼 깨닫는 감회다.
그러나 지금도 늦지 않다. 우리는 스스로 긍지를 찾아 갖는 일에 게을리 하지 말자. 그 긍지는 누가 주지 않는다. 우리가 땀흘려 만들고, 값있게 간수해야 한다. 그 때 일본은 우리가 목소리를 높이지 않아도 역사를 두려워하는 생각을 갖게될 것이다. 우리는 교과서보다도 일본인의 마음을 시정하게 만들어야 한다. 최종률 <본사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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