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 "미디어 정책 글로벌 기준 맞춰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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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신문·방송·통신·인터넷. 이들 간의 결합이 속도를 내고 있다. 매체 간 장벽도 허물어지고 있다. 디지털 기술의 혁명적 발전 덕분이다. 이런 미디어 융합을 지탱하고 촉진하는 것 중 하나가 법과 제도다.

한국의 경우도 그간 방송.통신 구조개편 논의가 뜨거웠다. 하지만 결론 없는 논의로 열기는 식고 있다. 구조개편위원회를 누구 직속으로 할지를 놓고 소모전만 거듭하는 중이다. 미디어 산업의 큰 그림을 어떻게 그릴 것인가 하는 근본적 고민은 전개조차 되지 않았다.

그럼 선진국들은 어떤가. 본사 취재팀은 한국방송영상산업진흥원(원장 류균)과 공동으로 선진국의 최근 미디어 융합 정책을 조사했다. 결론은 분명했다. 이들은 디지털 시대의 미디어 정책을 총체적으로 재조정하는 한편 법과 제도를 착실히 정비하고 있다. 우린 여전히 정치적 공방에만 머무를 것인가.

?규제 완화가 대세=미국 등 선진국은 미디어 융합에 따라 규제기구를 일원화하는 등 발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유럽에선 유럽연합(EU) 차원에서 융합지침을 마련 중이기도 하다. 미디어 시장의 단일화와 경쟁 촉진을 위한 규제 완화가 기본골자다.

미국은 이미 1943년부터 연방통신위원회(FCC)가 방송.통신에 관한 기본정책 수립을 총괄해 왔다. 96년엔 통신법을 고쳐 케이블방송 사업자와 지역 전화사업자 간의 진입 규제까지 텄다. 과감한 규제 완화로 미디어 융합 시대를 준비하고 있다. 물론 신문.방송.통신 등 매체 간의 겸영(교차 소유)도 허용돼 있다. 뉴욕 타임스.워싱턴 포스트 등 유수의 신문들이 방송사를 운영하며 수익의 안정을 꾀하고 있다.

영국은 더 적극적이다. 미디어 산업을 통한 '제2의 대영제국'을 꿈꾸고 있을 정도다. 영국은 96년 방송법 개정을 통해 미디어 소유규제를 대폭 완화했다. 신문과 방송의 겸영을 허용하고 사업자 간 자유경쟁 체제를 도입했다. 2003년엔 유럽 아닌 다른 지역의 기업도 영국의 TV와 라디오를 소유할 수 있게 해놓았다. 한걸음 더 나아가 2003년 기존 방송과 통신 규제기구 5곳을 묶어 커뮤니케이션 위원회(OFCOM)를 탄생시켰다. 방송.통신 업계가 "중복 규제와 간섭이 줄었다"고 환영한 건 물론이다.

분주하긴 독일도 마찬가지다. 97년 세계 최초로 방송.통신의 융합을 권장하는 '멀티미디어법'을 제정한 이후 상황변화에 맞춰 법률을 유연하게 고치고 있다. 기술의 발달로 돌출되는 문제를 고정된 법체계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 판단에서다. 최근에도 몇 가지 관련 법을 아우른 '텔레미디어법'을 준비 중이다.

일본은 방송과 통신의 밥그릇 싸움을 없애기 위해 2001년 제3의 법인 미디어서비스법을 통과시켰다. 이런 규제 완화로 인터넷방송(IPTV) 등을 한국보다 먼저 시작할 수 있었다. 매체 간 겸영도 자유로워 아사히신문과 요미우리신문 등 전국지들이 지상파 방송을 같이 운영하고 있다. 프랑스의 경우 정책기관과 규제기구가 나뉘어 있지만 2004년 통합법을 제정해 미디어 융합에 대응하고 있다.

?제자리걸음하는 한국=한국에서 미디어 융합 얘기가 나온 건 어제오늘이 아니다. 방송통신위원회 설립은 노무현 대통령의 대선 공약사항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여전히 논의만 분분할 뿐 진전이 안된다. 사업자 간 이해관계와 부처 간 밥그릇 싸움에 휘둘리기 때문이다.

더구나 지금의 논의도 숲을 보지 못하고 나무 몇 그루를 손질하는 수준에 그친다. 미디어 전체를 총괄하거나 세계 기준에 맞추려는 노력이 부족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한 예로 지난달 발효된 신문법은 신문사가 뉴스통신.방송매체를 겸영할 수 없게 금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미디어 간 융합이 가속화하는 상황에서 정치논리만 앞세운 것이라는 게 많은 학자들의 주장이다. 강원대 정윤식(신문방송학)교수는 "뉴미디어 정책의 핵심 가치는 다양성 확보"라며 "한 사업자가 방송영상 산업의 30% 이상을 차지하지 않는 범위에서 누구나 시장에 뛰어들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말한다.

?"미디어 산업, 원점에서 새판을 짜자"=전문가들은 "'미디어 빅뱅'상황에서 제대로 된 그림을 그리는 한편 무엇보다 글로벌 스탠더드를 고려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정치적 이해 관계에만 매몰돼 우리만 엉뚱한 방향으로 내달리는 일이 생겨선 곤란한다는 것이다.

이는 선진 6개국을 돌고 온 방송진흥원 연구원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미디어 산업 전체의 시너지 효과를 고려하는 차원에서 정책이 만들어져야 한다는 것이다."원점에서 미디어 정책 전반을 재설계해야 한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강만석 박사는 "미디어 융합은 피할 수 없는 대세인데 일부만을 규정하는 법을 만들어선 봉합 수술만 거듭하게 된다"며 "법.제도 정비는 세계 수준으로 업그레이드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디지털 융합에 따른 미디어 융합은 미디어 고립주의의 벽을 허물고 있다"며 "신문.출판.영화.통신.방송 분야 등을 아우르는 다미디어 복합기업이 출현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별취재팀=김택환.이상복 기자, 방송진흥원 강만석(영국).성숙희(독일).윤호진(미국).김영덕(일본).이기현(프랑스).이동훈(호주)연구원

◆ 8월 5일자 미디어면 '미디어 정책 글로벌 기준 맞춰야' 제하의 기사와 관련, 공동기획자인 한국방송영상산업진흥원 측에서 이의를 제기해 왔습니다.

최근 선진국 방송.통신 융합 정책에 대한 방송진흥원의 연구와 중앙일보 자체 취재를 결합한 공동 기획기사였습니다. 방송진흥원 측은 "우리 연구는 방송.통신 융합 정책에 한정된 것으로 '신문 방송 겸영 허용'이라는 기사의 기본 논지와는 무관하다"며 "내용 전체를 '공동 연구'한 것으로 오해할 소지가 있다"고 밝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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