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영희 칼럼

동북아 평화헌장 같은 핵 합의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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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희
김영희 기자 중앙일보 고문

건강한 아이가 나오려면 산통(産痛)도 크다. 북핵에 관한 베이징회담 공동성명도 내용의 깊이와 넓이에 걸맞은 산통을 겪고 있다. 북한이 평화 목적의 핵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하여 회담은 큰 고비를 맞고 있다. 중국이 초안을 만든 6자 합의문의 특징은 북핵 해결을 궁극적으로는 동북아시아 평화대장정의 첫걸음으로 삼겠다는 참가국들의 의지가 담겨 있는 것이다. 아주 전향적인 문서다.

과거의 북핵 회담에서는 핵문제를 먼저 해결한 뒤 북.미, 북.일 관계를 정상화한다는 길고도 안개 속같이 불확실한 여정(旅程)이 전제가 되었다. 그래서 북한은 핵문제 해결에서 출발해 미국과 관계를 정상화하고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 체제의 안정을 보장받고 외부세계의 경제지원을 받기까지 어떤 변수가 돌출해 결과적으로 핵이라는 지렛대만 버리는 꼴이 될 난감한 처지를 경계했다. 부시 정부가 핵문제 해결에만 집착하고 북.미 관계 정상화와 평화협정 체결 같은 포괄적인 북한정책을 내놓지 않는 한 북한이 핵을 포기하기를 기대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4차 6자회담에서는 핵 협상이 핵 포기 대 북.미 관계 정상화를 축으로 진행되었다. 북.미 관계가 정상화되는 단계라면 북한에 대한 경제제재 해제와 테러 지원국 명단에서의 북한 이름 삭제는 이미 끝났다는 의미다. 그리고 북한이 요구하는 평화협정은 북.미 관계 정상화와 병행해 체결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방식이라면 북한은 핵을 포기하면 그들이 당도할 종착역이 어디인지, 그들이 핵 대신 얻을 반대급부가 무엇인지를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다.

중국의 초안대로 핵문제의 해결과 함께 남북한과 미국.중국.일본.러시아가 동북아시아의 항구적인 평화와 안정을 위해 공동으로 노력하기로 한다면 그것은 동북아시아 문제에 관해 4강이 역사상 처음으로 합의에 이르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합의는 '동북아시아 평화헌장' 같은 역사적인 문서를 낳을 수도 있다. 북한체제의 안전보장은 그런 문서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을 것이고 북한은 자연스럽게 동북아시아 공동의 집의 한 구성원이 될 것이다. 미국과 중국이 2030년께를 시야에 두고 패권경쟁을 하는 지금 가장 절실한 것이 이 지역의 평화.안정.번영을 위한 역내 국가들의 공동의 노력과 협력이다.

핵 폐기의 범위를 둘러싼 북한과 미국의 입장 차이가 마지막 걸림돌이다. 이 장애물은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에 복귀해 조약체결국의 권리와 의무를 행사는 방식으로 극복되어야 하고 극복될 수 있다고 생각되었다. NPT에 가입한 나라는 그 권리로써 평화 목적으로 핵을 가질 수 있고, 그 의무로써 사찰을 포함한 모든 룰을 지켜야 한다. 북한의 경우 미국이 북한을 신뢰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다. 북한이 1994년 제네바합의를 위반한 전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도 합의를 지키지 않았다.

해결책은 둘 중 하나다. 한국.미국.중국이 북한을 더 설득해 평화 목적의 핵 프로그램을 포기시키든지, 그게 안 되면 북한의 표현대로 북한을 믿고 맡겨보는 것이다. 94년 제네바합의는 북.미 간 합의였던 것에 반해 베이징합의는 6개국의 다자간 합의가 되기 때문에 북한이 NPT 체결국의 의무를 위반하면 거기에 따른 위험부담은 제네바합의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클 것이다.

6자회담은 한국의 중대제안으로 어렵게 재개됐다. 김정일 위원장이 정동영 통일부 장관에게 한 통 큰 발언과 거기 상응하는 미국의 제스처가 있어서 가능했다. 북한은 핵무기를 가졌거나 가지기 직전에 와 있다. 북한이 공식적인 핵 보유국이 되어버리면 핵협상은 차원이 달라진다.

그래서 이번 기회를 반드시 살려야 한다. 마지막 한번의 턱걸이에 필요한 신뢰가 모자라 회담이 실패할 위험이 있다면 미국의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이 평양으로 달려가야 한다. 라이스가 못 가면 크리스토퍼 힐 차관보라도 가야 한다. 필요하다면 정동영 장관도 평양에 한번 더 가야 한다. 핵 합의에서 동북아시아 평화헌장까지는 먼 거리가 아니다. 무엇보다도 김정일 위원장의 또 한번의 결단이 요구된다.

김영희 국제문제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