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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독 병의 뿌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만화가 걸작이다. 서독의 한 신문은 요즘 『오늘의 서독 경제』라는 표제를 붙인 만화 한폭을 싣고 있었다. 그림이라니, 흑판 같은 검정 일색.
그런 현실은 최근 전자제품의 세계적 명문인 텔레풍켄의 도산에서도 볼 수 있었다. 지난해 대출65억8천9백만달러, 순익 4백만달러의 경영실적을 기록하고도 이 회사는 끝내 쓰러지고 말았다. 10년 동안 누적되어 온 적자와 은행 빚을 견뎌내지 못했다.
이미 를라이 카메라, 펠리칸 만년필, 두알 (레코드 플레이어)도 비슷한 운명이었다, 이들은 모두 우리 눈에도 익은 명 브랜드의 회사들이다.
더구나 독일사람 특유의 기술집약형 제품을 만들던 회사들이란 점에서 놀라움은 크다.
문제는 그 직접 원인보다도 간접 원인에 있다. 바로 서독 병의 뿌리이기도 하다.
첫째 두알이나 펠리칸은 동족기업이 갖고 있는 구조적인 약점을 극복하지 못했다.
서독엔 특히 동족기업이 많다. 전후의 동화개혁은 현금자산을 가진 재벌들보다는 부동산 소유자들을 살아남을 수 있게 했다. 이들은 대부분이 동족기업으로 오늘의 서독 최대기업 1백50두 가운데 40두를 차지하게 되었다. 4분의 1이 넘는 비율이다.
이들 동족기업들은 체질적으로 폐쇄적이고 중앙집권적인 경영을 하고 있다. 우선 「지배유지」가 경영의 첫째 목표이고 동족간의 부화는 그 어느 경우보다도 심각하다. 역시 서독의 명문기업인 그룬디히도 이런 이유로 적자를 면하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보수성이 강해 외부환경에 쉽게 순응하지 못한다. 전업형 경영을 고집하기 때문이다.
서독의 카메라업계가 그 대표적인 예다. 스위스의 시계 업도 마찬가지.
서독 병의 또 하나의 간접적 원인은 마이스터제다. 도제식 기술전수방식은 그 동안 서독기말의 부통적인 뼈대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그 결실로 근로자들은 물질적, 심리적 여유를 갖게 되었다. 독일인의 둘도 없는 미덕인 부지런함과 성실성마저 병들게 만든 것이다.
다른 선진국들의 공업은 이미 공작기계의 NC화 (삭치 제어방식에 의한 자동화)로 밤 낮 없이 일하고 있는데 서독의 공장들은 노동시간과 자금을 따지기에 여념이 없었다.
『라인강의 기적』위에서 편안히 쉬고 있을 궁리만 한 셈이다. 기술혁신이나 새로운 경영 전략은 남의 나라 일이 되고 말았다. 텔레풍겐의 도산은 그런 경우의 하나다.
만년필 메이커인 펠리칸사는 뒤늦게 완구, 화장품, 사료업에 눈을 돌렸으나 자금 부족, 경영 전략 미숙에 결단력 마저 없어 결국 주저앉고 말았다. 요즘 서독 병의 증상은 유럽 관광지의 풍속에서도 볼 수 있다. 파리엔 독일인 전용의 관광버스가 등장 할 정도로 서독인 관광객이 붐빈다. 일하기보다는 놀고 보자는 풍조의 일면이다. 라인강의 기적을 이룩한 동면의 미덕은 지금 관광버스를 타고 유람으로 소일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애기들은 멀고 먼 남의 나라만의 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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