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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 100대 드라마 ③문화] 23. TV와 사회변화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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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공전의 히트를 한 TBC 일일드라마 ‘아씨’. 극중 아씨(김희준)는 남편(김세윤)이 신여성과 공공연히 외도를 일삼는데도 여필종부 삼종지덕의 가르침을 굳게 따른다. 시어머니와 시누이의 구박을 참아내며 남편이 밖에서 낳아온 아들까지 친자식처럼 사랑하며 키워냈다. 당시 ‘아씨’가 방송되는 시간엔 전국의 수돗물 사용량이 줄었다는데. 이렇게 ‘속 터지는’스토리에 열광한 게 불과 한 세대 전의 우리 정서였다.

지난 6월 막을 내린 KBS2 주말드라마 ‘부모님전상서’. 남편(허준호)의 외도를 눈치챈 아내(김희애)가 야구방망이를 들고 남편이 딴살림을 차린 집을 찾아간다. 문이 열리자마자 가재도구를 다 때려부쉈다. 남편이 싹싹 빌며 용서를 구하지만 한번 무너진 신뢰는 어쩔 수 없다는 아내.

결국 이혼을 관철한다. 격세지감 그 자체다.

“드라마는 한 사회의 변화를 명시적으로 보여주는 텍스트 기능을 한다.” 최근 『한국사회의 변화와 텔레비전 드라마』(커뮤니케이션북스)를 펴낸 정영희 박사는 드라마와 사회의 관계를 이렇게 정의했다. 지난 40년 동안 TV 드라마는 우리 사회의 변화를 고스란히 담아냈다. 특히 가족의 변화, 그 중에서도 가부장제의 붕괴는 드라마 속에서도 가파르게 진행됐다.
70년대엔 여성의 순종적이고 희생적인 삶이 드라마의 흥행코드였다.‘아씨’의 뒤를 이어 72년 시청자들을 사로잡은 ‘여로’는 가난한 집안의 착하고 예쁜 처녀(태현실)가 돈 많은 부잣집에 팔려와 바보 남편(장욱제)과 살아가면서 겪는 애환을 그려 인기를 끌었다. 72년 MBC의 간판 드라마였던 ‘새엄마’는 가족의 무관심과 냉대를 참고 견디며 사랑과 희생으로 대가족을 화목하게 꾸려가는 주부가 주인공이었다.
이런 가부장 문화에 대한 절대적인 지지는 90년대 들어서야 바뀐다.

92년 방송된 ‘아들과 딸’은 그동안 당연지사로 받아들였던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를 변화의 대상으로 다뤘다. 남아선호사상이 강한 집안의 아들과 딸로 태어난 귀남(최수종)과 후남(김희애). 후남은 귀남의 수학여행을 위해 자신의 수학여행을 포기해야 했고, 대학에 합격했을 때도 귀남이 떨어졌다는 이유로 “아들 인생을 가로막았다”며 구박을 받는다. 그렇다면 귀남이라도 행복했을까. 자신에게 기대를 걸고 있는 부모를 위해 사랑하는 사람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귀남. 여자라는 이유로 부당한 대우를 받는 후남뿐 아니라 남자다울 것을 끊임없이 강요당하는 귀남 또한 남아선호사상의 피해자라는 사실이 적나라하게 그려졌다.

90년대 중반 이후 드라마 속 가족 설정이 핵가족으로 굳어지면서 할아버지·할머니가 점차 사라졌다. 특히 영향력이 약해진 할아버지의 퇴조는 두드러진다. 물론 그 이면에는 천정부지로 치솟은 톱스타들의 출연료도 한몫했다. 제작비를 줄이기 위해 조연의 숫자를 최대한 줄이려다 보니 노인 배역이 없어진 것이다.

가족의 형태도 많이 바뀌었다. 흔히 ‘정상가족’이라고 규정하는 ‘부부와 그 자녀’의 틀이 깨지고 있다. 현재 방영 중인 일일드라마 ‘굳세어라 금순아’만 해도 그렇다. 한 부모 가족(금순+휘성), 총각·이혼녀 커플(시완+성란), 사별 후 재혼한 부부(장박+영옥) 등의 삶이 다양하게 보여진다.

이렇게 무너진 가부장제 속에서 목소리가 커진 쪽은 역시 여성이다. 청순가련의 포장을 벗어던지고 할 말은 하는 ‘당당녀’가 주인공으로 부상했다. ‘내 이름은 김삼순’의 삼순이(김선아)처럼 재벌2세 꽃미남 앞에서도 욕까지 해가며 뻔뻔하게 맞서는 여주인공이 박수를 받고 있다. 시청자를 사로잡는 흥행코드가 ‘순종’에서 ‘당당’으로 바뀌는 데 꼭 한 세대가 지난 셈이다.

이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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