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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탁은행의 부정대출 국회서 폭로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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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건국초 부패에 대한 경계는 사힉적 분위기이기도 했다. 이대통령은 청렴을 무엇도 강조했다. 그는사람됨을 저울질하는톄 있어 돈에탐욕이 없는 성품을 제일의 요건으로 했다. 그는 부패행위는 용서치 않았고 그런일이 있었던 사람은 재등용하지 않겠다고 했다. 내무장관을 지낸 이탄흥씨의 회고는 부정부패를 경계한 대통령의 의지를 잘 말해준다.
『정부 수립후 얼마 지나서의 일입니다. 대통령이 불러 갔더니 자네 남전(경전과 통합돼 한전이 됨)을 맡아 관리해 보지 않겠나 그러더군요. 그때 남전이라면 제일 규모가 큰회사였지요. <전 돈만지는 일을 해보지 못했습니다. 못하겠읍니다> 그랬지요. 대통령은 <그래…> 그러시곤 그만이었어요. 그런뒤 내개다른 직책이 주어졌지요. 뒤에 대통령을 가깝게 모시면서 알게됐는데 그때 남전을 맡아보겠느냐는게 인물테스트였어요. 내가 그자리에서<시키는대로 하겠읍니다>라고 했으면<젊은 녀석이 돈은 꽤나 밝힌다>고 단정짓고 아마 남전은 물론 그후 어떤 요직도 맡기려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같은 대통령의 의지,그리고 되찾은 나라를 일으켜야 한다는 민족적 긍지가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다. 적어도 6·25이전까지 관료사회의 부패행위는 드물었다. 6·25이전 최대의 의혹사건으로 국회와 신문을 떠들썩하게 한것이 교통부의 철도청직원 제복 복지 수입과 관련된 이른바 조선신탁은행(한일은행 전신)의 부정대출사건이다.이 사건은 정부 각부처에 대한 심계원의 전면 회계감사에서 지적된 과오들중 내무부와 교통부에 해당되는 사건이다.
신탁은행 부정대출사건으로 불리는 교통부부정사건은 50년4윌15일국민당소속장병만의원(칠곡·6·25매 납북됨)이 제기했다. 장의원은 「요즘 세간에는 어떤 사람이 신탁은행에서 수십억원을 부정으로 대출받아 먹었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이문제를 심계원에서 진상을 조사해놓고도 쉬쉬하며 발표하지 않는것은 이해할수 없다. 심계원장을 불러 조사내용을 듣자』라고 긴급동의했다. 이 긴급동의에 대해 다른당원들운 대부분 사전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토론없이 표결에 붙여져 채택됐다. 그런데 심계윈장은 국회에 나오지않고 뜻밖에 대롱령이공한을 보냈다.
『국회의 요청대로 심계원장을 국회에 출석시킬수 있지만 조사가 진햅중이므로 공개할수는 없다. 국화가 사실을 알고자 한다면 비밀리 정한 몇의원에게 이경우도 조사가가하지 않는다는 알려줄 수 있다. 끝날때까지는 조건아래서만가능하다』 는 내용.
대통령의 이런 공한은 사건이 미묘한 청치성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장의원은 「대롱령이 이 문제를 비밀로 하자는 이유를 알수없다. 정부 수립후의 첫번째 금융부정사건인데 마땅히 국민앞에 공표해야한다』 면서 국회조사단 구성을 재안했다. 이에 대해 강선명의원 (목포·무소속) 은 『요즘 쌀값이 치솟고 있는데 민생문제는 뒷전에두고 정치공작대다, 신탁은행 부정대출이다해서따지는 동기가 무엇인가』 라고 반대하고 나섰다.
서순영의윈 (통영을·무소속) 도「장병만의원이 신탁은행사건을 계속 재기하는 것은 의아스런 느낌이 든다. 내 생각에 단순한 은행부정대출라면 사법기관이나 은행감독기관인 재무부소관의 얼이지 국회까지 나설일이 아니잖은가』 라고 했다. 그랬지만 역시 조사단구성 결의안은 가결돼 이로수(국민당) 김경도(민구) 김광준 김교중 김문평 (이상 무소속)의 다섯 의원으로 조사단을구성했다.
그러나 조사활동은 진전을 보지못했다. 조사위원간의 충돌이 그 원인이다. 4윌18일 본회의에서 이의수의원은 조사단에 문제가 있다고했다. 『지난 사흘동안 우리 조사단이 한 일은 신탁은행의 대출관련서류를 복사한것 뿐이다. 그러나 나 개인이 조사한바에 의하면 민중의금고인 신탁은행이 정치적 배경에의해 부정대출을 해준 것이 확인되었다. 그 액수는 20여건 십수억원에달한다. 이런 부정은 내가 30여명의 관계자를 불철주야 만나보고 확인했다. 이같은 엄청난 부정대출의 정보를 파헤치기 위해서는 유능한검사관 3명을 특채하도록 승인해주어야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의원은 『조사위의 김문평의원은 조사를 고의로 지연시켰다. 이는 공산당, 아니 그보다더 무시무시하고 비겁한 어떤 당의 조종에 의한 것이다』 라고 공격했다.
그러자 김문평의원이 등단했다.「내가 공산당의 모략과 지시에 의해 은행조사를 흐지부지 깔아뭉개려했다는 계의원의 말이야말로 공산당의 모략이다.」 바로 이말이 떨어지자 이당수의원이 「누가 공산당이랬어」라고 고함치며 명패를 내던졌다. 이 명패는 발언대의 김의원을 비켜 바로 앞에 있던 속키사의 얼굴에 정면으로 맞아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이 소란속에서 김경도·김광전의원이 조사위원직을 사퇴했다. 그래서 조사위원회는 기능이 마비됐고 제헌국회의 임기만료와 함께 조사결의안도 폐기되고 말았다.
심계원의 조사역시 6·25로 그서류마저 없어wu 사건의 진상은 역사의 뒤안으로 묻히고 말았다.
이 사건조사를 싸고 충돌했던 두당원중 이의원은 작고했다. 김문평씨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이의수의원은 국회에서 발언도 많이하고 좀 설치는 편이었어요. 신탁은행조사를 하면서도 다른 의원과는 협의도 없이 독단적으로 설쳐대 우리는 좀 차분히 조사하자고 했읍니다. 조사방법을 싸고 의견이 맞지 앓았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마치 자기혼자만 조사를하고 엄청난 부정이 있는양 떠들고 나를 어떤 경파의 조종을 받고있다고 몰아붙였기 때문에 싸움이된거지요. 이때문에 제대로 조사활동을 못하고 말았지요. 내 기억으로는 다소의 석대부가 있었던 것 같으나 구체적인 내용은 기억이 안납니다.
김의원 뿐 아니라 국회관계자들은 이 사건의 내용을 거의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바로 이 사건은 정치공작대 사건과 맥을 같이한 대통령 주변의 권력경쟁이어서 정치의 막후에서 치열한 싸움이 펼쳐졌던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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