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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책읽기] 들어라 야만의 역사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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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사막을 가로질러 그녀가 왔다.

검은 대륙의 북동부 '아프리카의 뿔'이라 불리는 소말리아의 여인. 아름다운 자연 속에 숨겨진 여성 학대의 가슴 아프고도 끔찍한 사연을 안은 채 그녀가 한국 독자들에게 성큼 다가섰다. 수퍼 모델 나오미 캠벨이 가장 좋아한다는 세계적인 패션 모델 와리스 디리. 그녀는 '불모의 초원'에서 물을 찾아 헤매며 낙타를 키우던 유목민의 딸이었다.

# 수천년의 세월을 건너 온 여인

"엄마는 아이를 낳기 위해 홀로 사막 한 가운데로 갔다. 한번은 엄마가 출산을 위해 사라졌는데, 그때 우리는 물을 찾아 이동을 해야만 했다. 엄마가 우리를 다시 찾는 데 무려 나흘이 걸렸다."

다큐멘터리 '사막의 꽃'에서 그렇게 털어놓은 그는 공식적으로 1965년생. 그러나 "나는 내가 몇살인지 사실 모른다"고 말한다. 어머니가 낳은 열두 명의 자녀는 여섯으로 줄었다. 그것이 아프리카의 삶이다. 생과 사는 공문서가 기록하지 않고, 모든 것은 알라의 뜻일 뿐이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겨우13살 때 낙타 다섯 마리에 팔려 백발이 성성한 노인과 결혼해야 했다.

그걸 피해 와리스는 미래를 찾아 도망을 쳐야했다. 명문가의 딸이었던 어머니는 사랑을 찾아 사막으로 시집을 왔지만, 딸은 원치 않는 결혼을 피해 도시로 도망쳤다. 마침 영국 대사로 부임하게 된 이모부를 따라 그녀는 런던으로 가게 된다. 비행기 안에서 백인을 처음 봤을 만큼 그녀는 문명 세계와 수천년의 거리를 두고 자랐다.

# 수천년의 세월과 싸우는 여인

"들쭉날쭉한 면도날에는 피가 말라붙어 있었다. 여인은 면도날에 침을 뱉더니 옷에 닦았다. 그리고 곧 내 살이, 내 성기가 잘려나가는 것을 느꼈다. 무딘 칼날에 쓱싹쓱싹 살이 잘려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와리스가 특별한 것은 아프리카 최빈국의 소녀에서 세계적 모델로 자리잡았다는 것 때문만은 아니다. 그녀는 야만적 여성 할례 의식을 고발한 용기있는 여인이다. '여성성기절제술', 책에 따르면 이는 음핵을 절개하는 '저강도 할례'에서부터 음핵과 소음순, 대음순까지를 잘라내는 '고강도 할례'까지 다양하다. 이 의식의 피해자는 전세계적으로 1억3000만명.

하루에 6000명 아프리카 소녀들이 난자 당하고, 심지어 뉴욕에서도 이민자들 사이에서도 시행된다. 하지만 비위생적 수술로 수많은 소녀들이 목숨을 잃는다. 막상 코란의 그 어디에도 명기된 바는 없다. 여성 할례는 사실상 정조대로서 기능할 뿐이다. 와리스는 모델로서 전성기에 있을 때인 1997년 이 사실을 폭로하면서 여성단체 '이퀄리티 나우'의 스타로 떠올랐고, 2004년 유엔 특별인권대사로서 활동 중이다.

# 여성의 미래를 준비하는 여인

그 전에 와리스의 삶은 '뉴욕의 유목민'이란 이름 아래 영국 BBC 다큐멘터리로 제작됐다. 와리스는 소말리아 말로 '사막의 꽃'이란 뜻. 그녀 역시 상처투성이 맨발로 사막을 떠돌다 패션계의 꽃으로 피어났다. 전체 글은 깊이있는 사회사적 통찰 등을 기대할 수 없지만 솔직담백하다. 그 처참한 환경에서도 명랑소녀의 기질을 잃지않는 의연함과 생명력이 놀랍다.

도도함이 배어있는 뚜렷한 윤곽의 와리스 얼굴이 주는 분위기도 꼭 그렇다. 소말리아인으로서의 정체성도 잃지않는 대목도 그를 다시 보게 만든다. 서구의 문명사회와 가족 제도 비판도 눈여겨 볼 점이다. 그런 점에서 위력있는 다큐멘터리 '사막의 꽃'은 '검은 신데렐라'의 탄생 스토리로 읽어서는 안될 것 같다. 위엄있는 아프리카 여인의 삶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배노필 기자

옮긴이 이다희씨 한마디…

"아빠가 제 번역원고를 감수하면서 몇 차례나 우셨다고요? 저는 처음 듣네요. 직접 들은 바는 없지만 저자가 털어놓은 '여성 할례' 묘사 등에서는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눈물이 많은 분이거든요."

'사막의 꽃'을 우리 말로 옮긴 이다희(26)씨는 소설가 겸 번역가 이윤기(58)씨 외동딸. 이번 책은 그로서도 의미가 크다. 셰익스피어 '한 여름 밤의 꿈' '겨울 이야기'등이 아빠와의 공동번역이었다면, 이 책은 혼자서 한 작업. 무엇보다 이 책은 그가 생각하는 여성적 정체성에 대한 인식과 잘 맞아떨어진다.

"와리스의 스토리는 물론 아프리카 잔혹사입니다. 그러나 여성 할례란 비유예요. '옮긴이의 말'에서 털어놓은 대로 혹시 우리가 관습이라는 이름 아래 자녀들에게 '정신적 할례'의 칼을 들이대는 것은 아닌지를 물어야 합니다. 그게 부모일 수도 있고, 직장상사.교사일 수도 있지요. 그 점에서 '사막의 꽃'은 우리 현실을 비추는 거울입니다."

2년 전 결혼한 이씨는 지식대중에게는 이미 친근한 인물. '춘아 춘아 옥단춘아 네 아버지 어디갔니'(민음사, 2001년)에서 아빠 이윤기씨의 대담자로 첫 선을 보였다. 이화여대.미 펜실베이니아주립대 철학과를 졸업한 그는 오는 9월 서울대 서양고전학 협동과정 석사과정에 입학한다. 고대 희랍어와 라틴어 실력이 기본인 혹독한 훈련과정이다

조우석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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