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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 인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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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1971년,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생전 일화 한 토막. 정 회장은 현대조선소 설립 자금을 빌리러 영국까지 갔다. 쉽지 않았다. 영국 은행은 "뭘 믿고 당신에게 돈을 빌려주느냐"며 냉담했다. 그러자 정 회장은 당시 통용되던 500원짜리 한국 지폐 한 장을 꺼냈다. "자, 이 지폐에 그려진 거북선을 보시오. 한국은 영국보다 300년이나 앞서 철갑선을 만들었소." 정 회장은 이 말 한마디로 돈을 빌릴 수 있었다.

화폐는 한 나라의 얼굴로 통한다. 도안 소재론 보통 인물과 자연 풍경, 상징물 중 하나가 선택된다. 그 때문에 돈엔 그 나라의 문화나 역사, 풍습이 담긴다. 낙타가 농사를 돕는 아프리카 튀니지 화폐엔 낙타가 나온다. 그러나 돈 속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것은 인물이다. 개개인의 인상과 개성이 뚜렷해 위.변조가 어렵기 때문이다. 수염을 많이 그려 넣는 것도 같은 이유다. (배원준 지음, '화폐로 배우는 세계의 문화')

미국은 10달러와 100달러 지폐를 제외한 모든 돈에 대통령을 새긴다. 조지 워싱턴은 1달러에 나온다. 서민들이 늘 친근감을 갖고 초대 대통령을 접할 수 있게 한 배려다. 한국 돈은 이순신(100원), 이황(1000원), 이이(5000원), 세종대왕(1만원) 등 조선시대 인물이 장악하고 있다. 유교 사상을 강조한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이 그 배경이다.

중국 돈의 주인공은 마오쩌둥이다. 87년 화폐 발행 시 마오는 저우언라이, 류사오치, 주더 등 개국공신들과 함께 100위안짜리 지폐에 나타났다. 그러나 중국 건국 50주년인 99년 화폐 발행 때는 모든 지폐의 단독 주인공으로 '중국의 돈 천하'를 통일했다. 그 마오의 가치가 21일을 기해 세계적으로 올랐다. 위안화 절상에 따라서다. 추가 절상이 예견돼 마오는 계속 '귀하신 몸'으로 대접받을 전망이다. 문혁 등 실정(失政)도 많았던 마오가 오늘과 같은 영화를 누리는 이유는 무얼까. '공(功)은 칠이요, 과(過)는 삼이라.' 후대가 그의 일생을 재빠르게 정리한 뒤, 더는 뒤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앞으로 나아간 결과다.

과거사 캐기에 발목이 잡혀 허덕이는 이웃 나라를 보며 지하의 마오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웃고 있을 것 같다. 차갑게.

유상철 아시아뉴스팀 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