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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 100대 드라마 ②의식주] 13. 마셨다, 시절의 애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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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포 한잔 합시다.”

1970년대까지 막걸리는 국민의 술이었다. 집에 손님이 오는 날이면 아이들은 양은주전자를 들고 골목길을 내달렸다. 아이가 점방에 가면 주인은 바가지로 독 안을 휘저어 물 탄 막걸리를 퍼 주었다. 꼬마들은 으레 집이 보이는 모퉁이를 돌기 전에 멈췄다. 그리고 주전자 주둥이를 입가에 걸치고 ‘딱 한 모금만…’ 하다가 캑캑거리곤 했다.

20세기 들어 막걸리 사발에 가득 찰랑인 것은 망국의 울분이었고, 동족상잔의 피눈물이었다. 또 입가로 흘러내려 가슴을 적신 것은 군화에 짓밟힌 4·19의 절망이었고 노동의 고달픔이었다. 모내기하던 농부는 논둑에서 농주로 피로를 씻고, 도시로 떠나온 이농민들은 대폿술로 타향살이를 달랬다. 아이들과 여자들은 술지게미로 배고픔을 잊기도 했다 막걸리가 힘든 시절을 동고동락한 벗이었지만 품질이 썩 좋지는 않았다. 먹을 양식이 없던 때라 64년부터 쌀로 술 빚는 것이 금지됐다. 대부분 밀가루나 옥수수로 만들 수밖에 없었다. 하룻밤 새 숙성시키고 단맛을 내려는 장삿속에 카바이드·사카린을 섞은 불량품까지 나돌았다. 막걸리집 골목을 빠져나오기 전에 왝왝, 토악질하며 포장마차 등불의 연료인 카바이드를 게워 내야 했다. 설탕보다 500배가 달다는 사카린은 나중에 발암물질로 판명됐다. 77년 해방 이후 최대 풍작으로 쌀이 자급자족되면서 쌀막걸리가 14년 만에 부활한다. 그러나 탁주의 참맛을 선보인 것도 잠깐, 냉해가 닥친 80년의 대흉년으로 다시 긴 숙성기에 들어간다.

골목길에서 막걸리를 배운 젊은이들은 경제 개발과 함께 공장으로, 건설 현장으로, 수출 전선으로 나갔다. 군사정권은 “우리도 한번 잘 살아 보세”라고 다그치고, 국민들은 밤낮을 잊고 삽질하고 나사를 조였다. 빌딩도 고속도로도 ‘빨리 빨리’ ‘조기 완공’을 하려면 느긋하게 술을 마실 틈이 없었다. 70년대 고도성장의 엔진엔 고도의 술이 필요했다. 빨리 취하고 싸게 마시자니 소주였다.

증류주가 나오던 64년까지 소주는 35도짜리로 꽤 독했다. 이듬해 쌀을 원료로 한 증류주가 금지되고, 정부가 할당해 주는 주정에 물을 타는 희석식이 부상했다. 그때 도수도 조금 희석됐지만 30도였다. 소외된 노동자, 도시빈민, 서민의 상처투성이 가슴까지 소독하자니 독해야 했다. 소주 하면 떠올리게 되는 25도짜리는 74년에야 나온다.

안 그래도 급한 술꾼의 마음을 옥죈 것이 통행금지였다. 밤 12시, 공포의 사이렌 소리가 울리면 상점의 불빛이 일제히 꺼지고 달리던 차가 멈추었다. 길목마다 바리케이드가 쳐지기 전에 술을 털어 넣었다. 못다 마시면 술병을 들고서 여관으로, 집으로 튀었다. 자칫 간이라도 부어 호기를 부렸다간 방망이를 찬 방범대원에게 끌려가 유치장에 갇혔다. 일 년에 딱 두 번, 크리스마스이브와 제야에 통금이 해제되었다. 그 밤이면 도시마다 인파가 몰린 중심가는 발 디딜 틈이 없는 해방구로 흥청거렸다.

긴급조치가 꼬리 무는 70년대 유신정권의 암흑 속에서 새 세상의 효모가 꿈틀거렸다. 최루탄을 뒤집어쓴 대학생들은 골목으로 쫓겨다녔다. 그들이 찾아든 곳은 통기타의 포크송이 흐르는 생맥줏집이었다. 청바지를 입은 장발의 학생들은 저당 잡힌 민주주의를 절규했다. 대학가를 중심으로 싹튼 저항의 청년문화, 그 발효제는 맥주였다. 70년 8만6000㎘가 생산된 맥주는 10년 뒤엔 약 7배로 부풀었다. 그럼에도 아직 맥주는 지갑이 얇은 학생이나 서민에게는 고급술이었다.

쿠데타 정권의 3S(screen, sports, sex)정책, 기업들 뒷거래의 접대문화, 부동산 투기의 뭉칫돈, 통행금지가 풀린 심야영업…. 폭정과 산업화의 그늘이 드리워진 80년대는 요지경이었다. 1차 소주, 2차 맥주, 3차 양주의 철인경기식 음주 행태가 생길 만했다. 군사정권은 기업·언론 등을 통폐합하면서 맥주에 위스키를 통폐합하는 폭탄주를 퍼뜨렸다. 룸살롱에서 기업인이 관료를 구워삶고, 상사원이 바이어에게 ‘기름칠’을 하면서 뇌관에 불을 댕겼다. 검찰이든 정치판이든 상명하복의 권위주의가 있는 조직이면 폭탄주의 공습을 피할 수 없었다. 그때 동네 가게에는 럼 계열의 캡틴큐와 브랜디 계열의 나폴레온이 깔려 야유회 가는 사람들이 값싸게 양주 마시는 기분을 낼 수 있었다.

맥주가 갑자기 대중 속으로 파고드는 이변이 생겼다. 80년 10월 ‘OB베어’라는 생맥줏집 체인이 문을 열었다. 선 채로 500cc 한두 컵을 즐기는 작은 공간은 퇴근길 직장인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크라운베어도 서둘러 문을 열었다.

문민정권의 시대가 열린 90년대에 들어 술 시장을 틀어막고 있던 마개도 샴페인처럼 터졌다. 89년 해외여행이 자유화되고, 90년 1인당 국민소득이 5000달러를 넘었고, 92년 서울 자가용이 100만 대를 돌파했다. 고급화되고 세계화되는 국민들 입맛까지 규제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주류 시장이 개방돼 각국의 술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막걸리·소주의 60년대, 막걸리·소주·맥주의 70년대, 소주·맥주·양주의 80년대를 거쳐 포도주와 전통주까지 손길이 뻗치는 모든 술의 90년대였다. 저마다 입맛에 따라 골라 마실 수 있는 술맛의 개성 시대가 열렸다. 취하기 위해 마시던 폭주에서 즐기기 위한 애주로 음주 문화가 숙성되었다. 술을 사양할 수 있는 확실한 보증수표로 자가용이 등장하면서 다들 건강을 챙기기 시작했다.

외환위기 태풍을 맞아 술자리도 거품이 꺼졌다. 밀실의 룸살롱보다 개방적인 단란주점과 노래방을 찾는 이들이 많아졌다.여성 취업이 늘면서 술 마시는 여성을 보는 눈이 누그러졌다. 그 여성 애주가들의 입맛을 따라 술도 부드러워졌다.그동안 소주 하면 25도로 통했던 고정관념도 20도까지 곤두박질쳤다.

2000년대는 바야흐로 각 분야에서 웰빙이 화두인 시대다. 하지만 60년대 전반 1.7ℓ였던 1인당 순수 알코올 소비량이 2002년엔 6.9ℓ로 4배로 늘어났다. 다른 나라에서는 소득이 늘면 고알코올 소비량이 줄어든다. 우리나라는 증류주 비중이 68%로 여전히 저알코올의 발효주를 압도한다. 희한한 나라다. 웰빙 바람과 함께 소주의 도수가 한껏 부드러워진 게 그나마 바람직하다고나 할까. 술-,약이냐 독이냐.

배두일 기자

70년대 목마른 청춘들‘포크송을 탄 생맥주’ 벌컥
윤형주 (가수)

오비스 캐빈, 쉘부르 같은 음악살롱에 가서 포크송을 들으며 생맥주를 마시는 것! 70년대 젊은이들이 여자친구 마음을 사로잡는 최고의 선물이었죠. 저녁 6시가 되면 서울의 명동은 북적이기 시작해 8시쯤이면 200석이 넘는 홀이 열기로 후끈후끈했어요. 저를 비롯한 송창식·김세환·양희은 같은 가수들이 통기타를 들고 나타나면 환호와 박수로 살롱이 터져 나갔죠. 맑은 통기타 선율로 순수와 낭만의 허기를 채웠고, 시원한 생맥주로 막막한 시절의 갈증을 풀었습니다. 다들 명동에 한번 진출하려고 몇 달치 용돈을 아꼈습니다. 모처럼 폼 잡고 햄버그스테이크라도 시키려면 입학 선물로 받은 시계까지 전당포에 잡히는 일쯤은 예사였어요.

그때 술집은 네 단계로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가 학사주점이죠. 낙지볶음에 막걸리와 소주를 하는 곳이었죠. 보통 거기서 웬만큼 배를 채우고 통기타 노래에 맥주를 찾아 음악살롱으로 옮기는 게 순서였습니다. 오징어와 땅콩에 맥주를 취하도록 마시기엔 주머니 사정이 신통치 않았으니까요. 음악살롱보다 조금 고급은 칵테일 바였죠. 꽤 여유 있는 직장인들이 들락거렸는데 카사블랑카나 레이디타운 같은 곳이었죠. 그리고 제일 화려한 곳은 역시 나이트클럽이었습니다. 힐탑바나 무학성, 대연각이 이름을 날렸는데 그룹사운드가 나왔었습니다.

저요? 물론 술 많이 마셨죠. 평생 마실 술을 그때 다 마셨습니다. 통금이 다 돼서야 일어나 택시를 잡으려고 퇴계로 방향으로 뛰던 기억이 엊그제 같습니다. 우왕좌왕하다 안 되면 나이트클럽으로 뛰어들었죠. 거기서 맥주 한 병을 시켜 놓고 꼼짝없이 새벽 4시까지 버티기를 했어요. 통금 해제 사이렌이 울리자마자 우르르 청진동으로 몰려가 소주로 해장을 하곤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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