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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일기] '쌈짓돈'으로 알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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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천인성 사건사회부 기자

"선생이 제자 돈을 빼앗은 꼴이니…."

학장 등 서울대 공대 보직교수 전원이 연구비 횡령 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고 보직 사직서를 제출한 다음날인 26일 한 교수는 고개를 숙인 채 이렇게 말했다.

한 달 새 두 명의 교수가 연구원.학생의 인건비와 연구자재 구입비 등을 착복한 혐의로 구속된 데 이어, 다른 교수들 8명이 검찰의 내사를 받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서울대 공대는 크게 술렁였다.

16억여원을 횡령한 혐의로 구속된 오모(55) 교수는 국내에서 학회장 등을 역임하고 최근 미국 유명 학회에서 '올해의 논문상'을 수상한 '공대 대표 교수'인 터라 동료들의 당혹감은 더했다.

며칠 전만 해도 '몇몇 개인의 문제''언론의 과잉 보도'라 치부하던 교수들이 뒤늦게 솔직한 진단과 자성을 내놓기 시작했다.

한 소장파 교수는 "1990년대 말부터 'BK(두뇌한국)21'사업이 본격화하고 벤처 열풍이 불면서 공대의 연구비 규모가 몇 배씩 뛰어 웬만한 중소기업 수준인데 이를'쌈짓돈'처럼 여기는 버릇을 버리지 못했다"고 자탄했다. 연구비와 개인 돈을 구분하지 않는 관행이 문제라는 것이다.

연구용역 제도의 문제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많았다. 한 연구원은 "학생별 인건비가 천차만별인 데다 배분 과정 역시 교수 마음대로"라고 말했다. 교수들은 "공식적으론 연구를 맡은 교수에 대한 금전적 인센티브가 전혀 없다"고 볼멘소리를 했다. "연구활동비를 지나치게 제한하는 통에 대학원생들에게 식사비, 명절 선물이라도 대려면 '딴 주머니'를 찰 수밖에 없다"고 사정을 털어놓기도 했다.

공대 교수들은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해 연구비 사용 내역 실사 등의 제도를 검토하고 있다. 학교본부는 혐의가 드러난 교수들을 엄중 처벌하겠다고 공언했다.

서울대 공대는 '한국 과학기술의 메카'를 자임하는 곳이다. 국가 발전을 위해 이공계를 각별히 지원해야 한다고 큰 목소리를 내 온 곳이기도 하다. 최고의 지성들이 투명하고 정당하게 연구하는 곳으로 거듭날지 국민이 지켜보고 있다.

천인성 사건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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