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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주영 4년 반동안 보고 느낀 노제국의 명암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영국사람이 제일 자랑스럽게 느끼는 순간이 언젠지 아느냐?』한국대사관이 마련한 어느 만찬회석상에서 옆에 앉아있던 영국국회의원이 불쑥 물어왔다.
그게 언제냐고 되물었더니『저녁에 퇴근해서 자기 집 대문울 안으로 잠근 순간』이라는 것이 그의 대답이었다.
그때 나는 꽤나 배타적인 자랑스러움이로구나 하고 생각했었는데 영국에서 살면서 보니 그가 말한 진의는 배타성보다는 프라이버시의 중시 쪽에 있었던 것 같다.
이런 특성을 영국인들 스스로는『영국사람에게 있어서 집은 그의 성이다』라고 표현했다.
아무리 천한 직업을 가졌더라도, 또 아무리 밖에서 수모를 당하더라도 일단 자기 집에 들어서면 왕권도 감히 침범할 수 없는 프라이버시의 절대적 성역이 거기 있다는 자부심이 귀가해서 대문을 안으로 잠그는 순간 영국인의 마음속에 충만하게 되는 모양이다.
프라이버시를 영국인들이 얼마나 소중스럽게 생각하는지를 보여주는 예가 자동차내 안전벨트 착용에 관한 오랜 논평일 것 같다.
영국의회는 10년 전부터 차내 안전벨트 착용을 법으로 강요하려는 노력을 해왔다. 그동안 8번이나 이 법안을 표결에 붙였으나 매번 부결되고 지난해에야 9번째 표결에서 겨우 통과되었다. 그것도 완전한 것이 아니다. 2년 동안 시험적으로 실시한 후 결과를 검토해서 확정짓는다는 단서가 붙어 있다.
반대론자의 주된 주장은 자동차 안이 자기 집의 연장이라는 것이었다. 경찰이 개인집을 마음대로 넘겨다 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집의 연장인 자동차 안을 불심검문 할 수 없다는 것이고, 안전벨트 착용법이 제정되면 그런식의 검문이 불가피해져서 개인의 자유 중 아주 중요한 부분이 침해된다는 것이다.
이런 일화도 있다. 한 마약 밀매협의자의 재판에서 검찰은 그의 집에서 압수해온 증거로 마약봉지와 무기 몇종을 제시했다. 그런데 재판관은 마약봉지만 증거로 채택하고 무기는 증거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선언했다. 경찰관이 마약 밀매협의를 수사하기 위해 수색영장을 받았으면 마약이나 찾을 것이지 왜 무기까지 찾는다고 남의 집을 뒤졌느냐는 것이었다.
경찰쪽에서야 이런 판관의 견해에 화가 났겠지만 신문들은『영국인의 집은 아직도 성으로 건재해 있다』는 제목을 단 기사를 통해 이 판결을 환영했다.
비행기를 타고 영국 상공에 접근하면 안내원의 방송이 없어도 그곳이 영국이란 사실을 알게 해주는 모습이 한가지 있다.
그것은 바로 집집마다 둘러쳐진 생나무 울타리의 모습이다.
이 울타리는 길쪽으로 서 있는 것이 아니고, 이웃집과 면해 있는 뒤의 정원쪽에 있다.
그러니까 도둑을 막기 위한 것이기보다는 이웃으로부터 자기 집의 프라이버시를 지키기 위해 있는 것이다.
바둑판처럼 집과 집 사이를 경계하고 있는 이 생나무 울타리의 모습은 유럽의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프라이버시를 중시하는 특성이 사회적 단위로 확대되어 나타날때 향로애로 발휘되는데 이때문에 정부쪽에서는 골치를 앓는 경우가 허다하다.
런던남쪽 80km에『뉴 포레스트』라는 거대한 숲이 있는데 얼마전 여기서 유징이 발견되었다. 셸석유회사는 곧 여기서 시추작업을 시작하려 했으나 부근 주민들로부터 격렬한 반대에 부닥쳤다.
옛날 왕실사냥터로 사용되던 이 숲의 수천년 된 고목들이 석유채굴 작업으로 오손되는 것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반대에 부닥쳐 셸석유회사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형편이다.
비슷한 지방민의 반발로 런던 주위의 순환고속도로 M25는 시작한지 20년이 되도록 토막난 채 있다. 곳곳에서 반대하기 때문에 이어지지 못하고 부분적으로만 완성되어 있는 것이다.
또 런던의 제3공항도 여러해째 자리를 찾지 못해 고민중이다. 소음공해에다 몰려들 자동차와 사람의 홍수를 후보지 주민들은 윈치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나의 영역을 소중히 여기는 것은 곧 남의 영역을 소중히 여기는 결과가 되고 여러 영역들이 모여서 대가 된다고 말한다.
파업과 폭동, 경제적 낙후추세 등 기자의 체재기간 중 위기가 계속 중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가 전혀 흔들리지 않고 안정기조를 지속하고 있는 것은 그런 현실적 인성을 사회의 바탕으로 깔고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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