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상고심 54%가 이유 안 밝히고 기각 … 재판 불신 부채질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4면

‘6850만5019원’.

 공인중개사 홍모(48)씨는 이 금액이 적힌 금전공탁서를 항상 가방에 넣고 다닌다. 분한 마음을 떨칠 수 없어서다. 그는 2008년 고객으로부터 손해배상 소송을 당했다. 부동산 취득세를 줄일 수 있는 매매방식을 권하지 않아 불필요한 손해를 봤다는 것이다. 1심은 홍씨가 이겼으나 항소심에서 뒤집혔다. “원고에게 4655만원을 지급하라”는 판결이 나왔다.

 홍씨는 2010년 9월 대법원에 상고했다. 사안이 단순한 만큼 3개월, 늦어도 6개월이면 결론이 나올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1년6개월이 지나서야 패소 판결이 나왔다. 그동안 쌓인 이자만 2195만원. 홍씨는 “항소심이 끝난 직후 돈을 주면 나중에 승소해도 돌려받기 힘들 것 같아 지급을 미뤘는데 결국 이자폭탄으로 돌아왔다”며 “왜 늦어지는지 이유조차 설명해 주지 않았다”고 말했다.

 상고심은 3심제의 마지막 관문이다. 그러나 상고심 선고가 내려지면 승복하는 이보다 불만을 터뜨리는 이들을 더 많이 볼 수 있는 게 현실이다. 재판 당사자들은 물론 상당수 법조인도 제대로 심리를 했는지 믿지 못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특히 각종 단체들이 정치적 이해관계나 성향에 따라 정반대의 ‘불복 기자회견’을 하는 건 일상적 풍경이 됐다. 상고심을 향한 불신이 사법제도 전반에 ‘신뢰의 위기’를 확산시키고 있다는 분석마저 나온다.

 상고심에 대한 불만은 크게 두 가지다. 선고 전에는 재판 진행상황을 전혀 알 수 없다는 것과 선고 후 판결 이유가 무엇인지 설명을 들을 수 없다는 것이다. 지난해 대법원 사건(형사사건 제외) 중 54.3%가 ‘심리불속행 기각(심불)’으로 끝났다. 이 경우 법률상 허용된 상고 사유가 아니라는 이유로 판단 내용도 적지 않는다.

 심리불속행이 아닌 사건 역시 판결 이유가 한 장을 넘지 않는 게 대부분이다. 본지가 지난달 15일 대법원 1부에서 선고한 272건의 판결문을 분석한 결과 심리불속행 기각은 총 130건으로 47.8%였다. 판결 이유가 한 장을 채 넘지 않는 사건도 39.7%였다. 전체 87.5%의 판결문에 별다른 설명 없이 ‘원심의 판단은 정당하다’고만 적혀 있다는 얘기다. 법관 출신의 한 변호사는 “많게는 수천만원에 달하는 변호사 비용을 들여 상고한 당사자들이 한 장짜리 판결에 승복하기는 쉽지 않다”며 “심불은 선고시기조차 알려주지 않아 더 황당하다”고 했다.

 원인은 상고사건이 폭증하는 데 있다. 2004년 2만432건이었던 상고 건수는 지난해 3만6156건으로 늘었다.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장을 제외한 12명의 대법관이 주심을 맡게 되는 1인당 사건 수만 연간 3013건이다. 주말까지 일한다고 가정하면 하루 8.3건을 처리해야 한다. 한 현직 대법관은 “일하는 장소의 차이만 있을 뿐 모든 대법관이 어디를 가든 기록을 싸들고 다닌다고 보면 된다”고 설명했다.

 쏟아지는 사건들을 그나마 처리할 수 있는 비밀은 재판연구관에 있다. 대법원에는 부장급 판사 27명을 포함해 총 108명의 판사가 재판연구관으로 근무한다. 주심 대법관이 정해지면 해당 대법관이 간단한 사건은 전속조(專屬組) 재판연구관에게, 복잡한 사건은 심층조 재판연구관에게 보낸다. 대법관은 재판연구관들이 만든 검토보고서를 보고 자신의 의견을 정해 소부 합의에 들어가거나 전원합의체에 회부한다. 재판연구관 출신 변호사는 “상고 당사자들은 대법관들이 자신의 사건을 심리해 권리를 구제해줄 것이라고 믿지만 실상은 재판연구관에게 재판을 받는 것 아니냐는 지적까지 나오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사건 떼기에 급급하다 보니 사회적 의미가 큰 사건도 심도 있는 논의를 거쳐 결론을 내리기가 쉽지 않다. 지난해 전원합의체에서 결론이 난 사건은 22건에 그쳤다. 그 결과 대법원 판결이 나온 뒤에도 갑론을박하는 일이 잦다. 최근 불거진 ‘카카오톡 실시간 검열’ 논란이 대표적이다. 2012년 대법원이 소부(小部) 판결로 디지털 감청에 대해 ‘감청이란 그 대상이 되는 전기통신의 송수신과 동시에 이루어지는 경우만을 의미한다’고 판결했다. 이에 대해 “전원합의체 판결로 디지털 감청의 명확한 기준을 제시해 혼란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박민제 기자

◆심리불속행(審理不續行)=1994년 도입된 ‘상고심 절차에 관한 특례법’에 따른 상고심 재판 절차. 중대한 법령 위반 등 법에 정해진 요건 이외의 이유로 상고한 사건은 재판 없이 바로 상고를 기각할 수 있다. 사건 기록을 받은 뒤 4개월 이내에 이뤄지며 판결문에 이유를 적지 않고 선고공판도 열리지 않는다. 형사사건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