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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 성냥 50여년만에 전매품서 풀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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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완전한 자본주의 체제 아래 거의 무제한의 자유경제활동이 보장된 서독에서 지난 50년간 국가가 유일하게 독점해왔던 성냥전매사업이 내년 초에 끝나게된다.
외국으로부터의 수입금지는 물론 해외여행객에게까지 「개인의 필요량 이상 휴대불가」 품목으로 담배나 술만큼이나 엄격한 제한을 받아 보호돼오던 성냥공업이 83년 1월부터 서독시장에서 그 독점적 지위를 잃게된 것이다.
하필이면 성냥이 국가의 전매사업이 될 만큼 수익성이 큰 것이냐는 게 얼핏 떠오르는 의문이지만 그 뒤에는 퍽 재미있는 내력이 있다.
서독을 여행하는 외국 사람의 경우, 꼭 한가지 성냥밖에 없는데 대해 의아심을 가졌던 경험은 대개 있게 마련이다.
독일이 50년 넘게 성냥공업을 전매사업으로 묶어두었던 것은 이것이 물론 중요산업이라고 판단하거나 수익이 탐나서 그랬던 것은 아니다.
「히틀러」 등장 이전의 독일정부(바이마르공화국)가 스웨덴의 한 기업가로부터 재정차관을 얻어 쓰며 50년 동안 독일에서 성냥독점사업권을 주기로 약속한데서 독일사람들은 지난 50년 동안 세상에 성냥이라곤 「벨트휠처」란 상표밖에 없는 줄 알고 살아왔다.
1920년대 경제공황의 여파 때문에 재정적으로 한참 시달리던 당시의 독일정부는 1929년 스웨덴의 다국적 기업가이던 「이바르·크뤼거」로부터 뜻밖의 제의를 받았다. 1억2천5백만달러를 10년 거치 연 6%의 이자로 50년 동안 원리금 분할상환조건으로 빌려주겠다는 제의였다.
당시 1억2천5백만달러라는 돈의 덩치도 엄청난 것이었지만 금리나 상환조건 역시 파격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유리한 조건 대신 차관을 제공하는 31년부터 1980년까지 50년간 독일내의 성냥독점판매권을 요구했다.
「크뤼거」는 당시 40여개국에 1백50개의 기업을 가진 거상으로 유럽은 물론 일본·인도 등 아시아의 성냥시장까지 손을 뻗쳤던 인물이었다.
그는 독일에서와 마찬가지로 재정적으로 곤경에 처한 각국 정부를 상대로 상담을 벌여 헝가리·유고슬라비아 등 유럽국가와 남미에까지 손을 뻗쳐 독점사업권을 획득했으나 1932년 그의 보유주식들이 폭락, 사양길을 걷게되면서 현재의 「독일성냥전매회사」만 제외하고 모두 도산했다.
독일성냥회사가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스웨덴의 한 금융가가 폭락하는 주식을 매입해 「스웨덴성냥회사」를 설립, 독일성냥회사의 경영권을 인수했기 때문이었다.
지금처럼 라이터가 보급되지 않았던 당시로서 성냥산업 독점은 막대한 이득을 보장했다. 75년 프랑스에서 한번 쓰고 버리는 간편한 가스라이터가 개발되면서 성냥시장이 위축되기 전만 해도 독일성냥회사는 순이익만 2천만마르크(약 60억원)를 기록했다.
그러나 75년 이후 사양길에 접어들어 81년에는 6억5천만갑(판매액 3억9천만마르크 약 1천1백70억원)의 판매고를 기록, 3백20만마르크(약 9억6천만원)의 순이익을 올렸다.
당초의 계약은 1980년까지 원리금 상환과 시장독점을 끝내기로 했던 것이 2년 더 늦추어진 것은 2차대전 패전 후 재정난으로 허덕이던 서독정부에 대해 「스웨덴성냥회사」가 이자를 4%로 낮추고, 상환기간을 연장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돈을 빌려주던 때의 달러대의 절대가치로 상환하는 것이 아니라 상환당시의 마르크화 시세를 적용하는 호조건이었다.
그래서 서독정부는 최근 여러해 동안 서구의 여러 나라로부터 성냥의 전매사업이 자유경쟁시장원칙에 어긋난다는 합의와 해제압력을 받아왔지만 50년 전의 약속을 지켜왔던 것이다. <본=김동수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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