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 막는 비결? 게으르거나 무심하거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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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1호 34면

엉성한 한국말 발음으로 보이스 피싱을 시도하는 전화는 나른한 일상에 웃음을 던져주는 활력소라고 여길 수도 있겠지만 요즘 보이스 피싱업계는 그리 만만치 않다. 이쪽도 나름 정보 통신 IT업종이라 스마트 시대의 진화속도만큼이나 빨리 진화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최근의 시사 트렌드, 대중 심리, 그리고 당신의 가장 나약한 허점까지 파고드니 이 어찌 정치 경제 사회 및 심리학까지 총동원한 종합 기술이라 하지 않겠나. 역시 세상 일엔 쉬운 게 하나도 없다. 심지어 사기마저도.

이윤정의 내맘대로 리스트: 보이스 피싱 유감

일단 중국 말투가 사라졌다. 정확한 발음으로 “서울지검 금융사기팀 이일형 수사관”이라면서 대포 통장으로 당신이 범죄에 이용되었으니 ‘피해자 입증’을 요구하고 ‘제 3자에게 이를 발설할 시 공무집행 방해죄가 적용된다’고 법률 용어를 들먹이며 만연한 개인정보 피해 의식과 비전문가 열등 의식을 부추긴다.

고객님의 의심은 당연한 본능. 그러나 여기도 대책이 서 있다. “제가 전화를 걸어볼게요”라고 대응하면 요즘은 지역 국번과 비슷한 전화번호까지 자세히 안내해준다. 한 유명 변호사는 다행히 서울지검 전화번호를 외우고 있어 ‘그 번호는 틀렸다’며 끊을 수 있었단다.

노인 복지가 국가적 이슈인 상황을 이용 “00구 노인복지센터인데 노인 복지금을 매월 입금해드리겠다”라는 전화가, 군대 폭행 문제로 아들의 안위가 궁금할 때는 “지금 당신의 아들이 군대에서 맞아서 입원해 있다”는 전화가 걸려온다. 최근에는 은행권 해킹문제를 놓치지 않고 내 농협 계좌정보가 유출됐다는 식이 가장 흔하다. 새 주소체계로 변경됐을 때는 은행 등록 주소를 바꿔야 하니 정보를 알려달라는 전화가 걸려왔으며, 전화요금 미납 혹은 쓰레기 무단 투기 같은 당신의 작은 죄의식까지 놓치지 않고 호출하니, 보이스 피싱의 세계란 참으로 꼼꼼하고 세밀하다.

‘아들이 납치됐다’ ‘어머니가 피를 흘리고 계신다’며 당신의 가족사랑을 노리는 전화에는 “그 아들 속썩이더니 참 잘됐다. 잘 키워주세요” “어머니는 3년 전에 돌아가셨는데요”라며 적극적으로 상대의 의지를 무너뜨릴 수도 있다. 한번은 메신저로 친한 친구의 계정을 해킹해서 돈을 보내달라고 하기에 40년 동안 평생 익혀온 욕을 해주며 한달치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게으른 무심함이다. “고객님 당황하셨어요?”에 고객님이 당황하지 않을 때, 업자님들은 당황하게 된다. “당신의 계좌가 해킹되어….” “그래서요.” “아, 그러니까 고객님이 당황하셨을텐데 제가 지켜드릴께요” “네.” “자다 깨셨어요?” “네.” “근데 지금 위험한 상황인데 잠이 안 깨셨으면…잠을 깨고 다시 전화드릴께요.” “네.그러시던가요.”

보이스 피싱은 이제 우리 삶 속으로 ‘스며들었’고 개그의 소재로까지 쓰였다. 어리숙한 전화로 유머를 즐기는 시대다.

그런데 이게 정말 웃고 넘길 일일까. 국가를 모독하고 유언비어를 유포하면 카톡까지 실시간 감청이 가능한 첨단 정보시대, ‘보이스피싱과의 전쟁’이라도 높은 분이 선포하시면 도저히 해결이 안 되는 일인가 궁금해진다. 우리는 언제까지 이렇게 서로를 등쳐먹기 위해 온갖 창조적 지혜와 시사상식, 대중 심리학까지 동원하고 우리는 또 거기에 맞서는 대응책을 고심하다가 아이큐를 늘리며 살아야 할까.

우울해진 마당에 또 하나 날아온 문자. “고객님의 은행 계좌로 5억 원이 입금되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갑절 이상 오른 전셋값 때문에 속이 터져 있을 때였다. 5억이라. 생각만 해도 눈물이 핑돈다. 답문자를 보냈다. “고맙습니다. 덕분에 잘 쓰겠습니다.” 그래, 힘들고 서러울 땐 상상력이라도 자극시켜 주는 보이스 피싱에 위안을 받고 살아야지 어쩌겠나.

이윤정 칼럼니스트. 일간지 기자 출신으로 대중문화와 미디어에 관한 비평 활동을 하고 있으며 중앙SUNDAY와 창간부터 인연을 맺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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