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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라고 산 꿀이 설탕범벅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유치원에 다니는 큰아이가 기침을 자주하여 한약도 먹여보고 주사도 맞혀보았지만 쉽게 가라앉지 않던 터에 한 날은 퇴근하던 아이 아빠 손에 생각지않던 귀한 꿀 한병이 들리어왔다. 영남지방에서 가져온 믿을만한 진짜 벌꿀이라기에 고마운 마음으로 아침 저녁 공복에 물에 타먹이던 어느 날 강원도 사시는 고모가 오셨다.
벌을 키우시는 고모가 꿀을 보시더니 대뜸 그만 먹이라 하셨다. 벌꿀이 아니라 순설탕을 풀어만든 설탕범벅이라신다.
너무 많이 들어온 이야기이고 애당초 온통 진짜 꿀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벌꿀에 설탕이 조금 섞였겠지 하는 마음으로 하루라도 빠질세라 시간 맞추어 먹였는데….
아이속이 어찌됐을까 생각을 하니 밥맛조차 가셨다.
시장에 나가면 <진짜 참기름><정말 콩비지><순 콩두부>, TV에까지 <순식물성×××>-이런 진짜를 역설하는 말들에 습성이 되어 아무리 순수한 자연식품이라도 진짜라는 말이 첨부되어야 진짜인 줄 알던 내가 진짜 시비를 하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이야기이지만 아이에게 설탕범벅을 먹인 후부터 무언가 고치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던 차에 우리집에 새로운 식구가 세들어 왔다. 다음날은 주일이어서 우리 식구는 교회에 가게되었다.
나는 생각이 있어 문을 잠그려는 아이아빠에게 안방문은 물론 모든 문을 잠그지 말기를 권한 후 대문을 나서며 나의 의도를 이야기 하였다. 이사온 첫날부터 안방문까지 잠그지않고 나간다는 게 여간 마음에 걸리는 일이 아니지만 우리가 그 댁을 못믿으면 그댁은 우리를 믿겠는가? 한울안에 사는 옆방을 믿지못하는 마음으로 어찌 실증없이 마음속에 계신 신을 믿겠는가?
「불신시대」에 사는 우리지만 아이들과 우리부부, 옆방과 우리만은 불신없는 믿음의 울안을 만들고 싶어서 마음먹고 시작한 일이었다.
예배를 마치고 바삐 집에 오니 담장이덩굴이 온통 뒤덮인 우리집 대문은 활짝 열리어 있는데 계단아래 그늘밑에는이사오신 할머니가 낡은 돗자리를 깔아놓고 여자 아이와 함께 앉아계시지 않는가?
집을 비운 3시간. 솔직이 내마음은 크고 작은 불안감을 떨치어 버릴 수 없었는데 할머니를 대하니 좁은 소견의 송구스러운 마음을 숨길 수 없다.
할머니는 얼른 일어서시며 내품에 있는 아이를 받으신다.
뛰따라오는 아이 아빠도 나 이상으로 흡족한 기분인게 분명하였다.

<서울 관악구 신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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