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여성이 바꾸는 우리의 모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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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여성들이 종중에 진입한 것은 남자들이 그 속에서 뭘 하고 있는지 궁금했기 때문이 아니다. 숨가쁘게 삐걱거리는 우리 현대사의 앨범에서, 잘못된 사진설명 하나를 점잖게 고쳐 놓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지난주 대법원은 결혼한 딸들도 종중의 회원이 될 수 있다고 선언했다. 성과 본이 같은 한 겨레붙이의 집단을 종중이라 한다면 애당초 사전에서조차 회원 자격을 성인 남성에 한정한 적은 없었다. 종중 문 앞에 여성을 향한 금줄을 친 것은 낡은 관습과 남성의 권력이었을 뿐이다. 그것을 가볍게 깨뜨려 버렸으니 과연 21세기답다. 하급심의 젊은 판사들이 해내지 못한 일을 대법원의 노인들이 결행해 버린 것도 재미있다. 그러나 이것은 호주제 폐지에 이은 단순한 법적 사건이 아니다. 우리의 생활양식과 의식의 변화를 향한 상징적이면서도 구체적인 계기다. 변화의 목적은 당연히 양성 평등의 실현이다.

그렇다고 양성의 조화로운 삶이 반드시 거창한 꿈은 아니다. 말하자면 헌법이 규정하고, 법원이 간섭하며, 제도로 강제해야 가능한 힘에 겨운 과제가 아니란 의미다. 아침에 30분 일찍 일어나기로 하는 것, 점심식사 뒤에 짧은 낮잠을 즐기는 일, 저녁에 집 부근 공원을 산책하기로 하는 결정과 다를 게 없다. 그리하여 대법원의 종중 판결은 일상의 생활 속에서 양성 평등을 실천하라는 친절한 설명에 다름 아니다.

몇 사람의 사는 광경을 구경해 보자. 지방대학에서 가르치는 김두식 교수가 방학을 맞았으니 틀림없이 서울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전화를 해서 점심이나 저녁을 먹자고 했더니 예상대로 점심을 택했다. 그가 저녁 시간을 피한 까닭은 술을 마시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학기 중에 못한 자기 몫의 가사를 방학을 이용해 벌충할 계산이었던 것이다.

요즘 가장 인기 있는 소설가 박민규에게서도 비슷한 모습이 관찰된다. 그는 스스로 자기 성격을 '아내를 사랑하는 것'으로 규정한다. 직장을 그만두고 소설을 쓰기로 결심했을 때 아내는 당분간 생활비는 자기가 벌 테니 걱정하지 말라며 격려했단다. 그래서 그는 지금 오직 아내에게 잘 보이려는 욕심으로 글을 쓴다고 한다.

최근 아내의 출산 뒤 육아휴가를 낸 이정렬 판사의 이야기까지 구구하게 늘어놓을 필요는 없겠다. 소렌스탐이나 미셸 위가 남성 골프대회에 발을 들여놓을 때, 주변의 남자들은 묵묵히 여성에게만 떠맡겨두었던 일들을 나누어 한다. 이것은 그냥 어느 쪽 영역의 확장이나 성의 경계 허물기가 아니다. 인간의 세계는 양성이 고루 섞일 때 더 다채로워진다. 그래서 제대로 된 삶이 가꾸어진다. 인간다운 생활이 별것 있겠는가.

이렇게 쓰고 있자니 슬슬 두려워지기 시작한다. 하루의 자화상이 선명하게 떠오르기 때문이다. 아침에 깨어나면 아내가 이부자리를 개켜 벽장 속에 넣는다. 하지만 큼직한 요는 그대로 바닥에 둔다. 허리가 아파 들어올리기에는 무겁다는 아내의 이유가 낡아 가는 욧잇에 씌어 있다. 나는 꽤 한참이나 노려보다 마침내 평등의 무게를 실험이라도 하듯 마지막 침구를 들어올린다. 내일부터 내가 더 해야 할 일의 범위가 분명해지는 기분이다.

종중은 남자를 위해 만든 전통 속의 궁전이 아니다. 결혼한 여성이 남의 가문 종중 구성원이 될 남자를 생산하기 위해 존재하는 기능적 생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지구의 여성은 남성의 힘, 권력, 그리고 허영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장식이 아니다. 양성을 분명히 인정하는 태도, 그리고 중성이나 제4의 성까지 거부하지 않는 유연한 사고에서 비롯하는 다양성이 오늘과 내일의 인간 세상이다. 판결 하나에 힘입어, 작열하는 태양 아래서 우리의 문명이 더 익어 가는 느낌이다.

차병직 변호사 참여연대 집행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