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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건∼헤이그 이간 부채질 |소-서구 파이프라인 건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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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본=김동수 특파원】「헤이그」전 미 국무장관은 미국과 서구의 미 동맹국간을 긴장시키고 있는 소련과 서구간의 가스파이프라인 건설문제에 관해「레이건」대통령과 견해를 달리했으며 이것이「헤이그」퇴진의 한 요인이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헤이그」는 미국회사들의 파이프라인 건설자재 공급을 중단시킨「레이건」의 조치에 반대의사를 분명히 했었다. 지나친 소련 강경 조치라는 「헤이그」의 주장이었다.
가스공급선의 건설계획은 세계최대의 천연가스 매장지역인 시베리아의 북쪽 지방 야말 반도에서 서구까지 연결되는 이 파이프라인을 서구국가들이 건설해 주고 가스를 공급받는다는 것이다. 「레이건」행정부는「미국장비사용불가」라는 자재금수조치로 이를 가로막고 나서는 바람에 서구와의 관계가 불편해지고 있다.
불과 보름 전 파리의 서방선진국 경제정상회담에 참석해 『소련 및 동구와의 경제교류는 순리대로 해결하고 보호무역주의 적인 압력을 배제』하기로 약속, 동서간의 가스파이프라인사업을 양해하는 듯한 제스처를 보였던「레이건」미대통령이 식언한 듯한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일부 과격한 언론들은 서구정치지도자들이 미국으로부터 배신당했다고 까지 극단적인 표현을 쓰고 있다.
서구와 소련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 가스파이프 라인계획은 경제적인 측면에서 모두 이해가 맞아떨어지는 사업이다. 계획의 골자는 추정 매장량 7천5백억 입방미터로 단일 규모로는 세계 최대 가스매장지역으로 알려진 시베리아 북쪽의 야말 반도에서 서구까지(서독뮌헨) 5천km의 파이프라인을 서구자본으로 건설해주고 그 대가로 소련이 85년부터 해마다 4백억 입방미터 씩 서구에 공급한다는 내용이다.
서구로서는 2백20억 달러의 서방기술과 자본을 필요로 하는 이 사업이 군침을 돋우기에 충분하다. 더욱이 서독을 비롯해 영국·프랑스·이탈리아 등은 이미 1백25억 달러의 공사를 수주해 파이프라인 매설공사를 벌써 진행중이다. 최근의 경제불황과 실업자문제로 시달리고 있는 서구 국가들에 이만한 상거래는 경기자극과 고용효과 면에서 적지 않은 숨통을 틔게 할 것으로 기대해왔다. 더구나 소련으로부터 25년 동안 가스공급을 받도록 돼 있어 장기적으로 에너지원을 확보하게 된다는 계산도 하고 있었다.
소련 측으로 보자면 파이프라인건설은 서구 쪽 보다 훨씬 다급한 편이다.
막대한 국방비에 동구 및 제3세계 .친소국가들에 대한 경제지원, 아프가니스탄전쟁 때문에 외화가 거의 바닥나 서방자본이나 외국돈을 끌어들일 수 있는 길만 있다면 물불을 가리기 힘든 지경에 처해있다.
최근 몇 년 동안 소련이 석유를 동구국가들에 제공하지 못하고 서방시장에 내다 팔고 폭락세를 보여온 국제 금시장에 계속 보유 금을 투매 하고 있는 것은 외화 때문에 얼마나 궁핍한 처지에 몰려있는지 잘 설명해주고 있다.
따라서 서구∼소련이 추진중인 시베리아횡단 파이프라인 건설계획은 현금 베이스가 아닌 외상거래로 하게 돼있다. 장비와 기술은 서구가 제공하고 가스로 상환 받는다는 일종의 바터 거래 형식이다. 소련으로서 더욱 구미가 당기는 것은 공급 대상 국이 공사를 맡은 서독. 프랑스·이탈리아 뿐 아니라 오스트리아·네덜란드·벨기에· 스위스·스웨덴 등 많은 유럽국가들을 포함하고 있어 85년의 공급개시와 함께 해마다 10억 달러를 현금으로 벌어들일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서구-소련간의 장사를 위험하고 못마땅하게 여겨온 것이 미국이다. 파이프라인상담이 시작되던 「카터」행정부 때부터 미국은 서구가 소련에너지에 의존하게될 경우 안보전략상 소련의 올가미에 걸려들게 될 것이라고 견제해왔다. 유사시나 동서간에 큰 흥정거리가 있을 경우 소련이 파이프꼭지를 틀어쥐고 서구에 압력을 가하게 될 것이라는 이유다.
뿐만 아니라 자본부족으로 허덕이는 소련에는 10억 달러의 외화를 벌어들일 수 있도록 해 서방기술과 장비를 도입할 수 있는 여유를 제공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소련의 군비확장에 기여, 그만큼 서방이 불리한 상황에 빠지게 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서구국가는 소련의 가스공급은 에너지를 무기로 한 소련의 압력을 무시해도 좋을 만큼 미미하다는 반론을 펴고있다.
파이프라인 건설계획에 앞장서 참여, 소련이 서구에 공급할 가스의 3분의1가량 (연간1백억 입방 미터) 을 받아들이게 돼있는 서독의 경우 그것이 국내 총수요의 5%에 미치지 않기 때문에 우려할만한 대소의존도는 못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소련이 가스공급을 일방적으로 중단한다고 가정하더라도 그만한 부족량은 비축에너지로 충분히 메울 수 있다는 얘기다.
뿐만 아니라 미국의 반대는 단순한 안보전략상의 이유 때문만이 아니라 알래스카 및 캐나다의 북 미산 가스로 막대한 서구에너지시장을 지배하려는 경제적 속셈이 깔린 것으로도 서구국가들은 보고있다.
이처럼 서구국가들이 미국의 설득을 외면하자 「레이건」정부는 미국기술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금수조치를 들고 나와 물리적인 압력을 동원, 파이프라인건설공사를 규제하고 있다. 미국이 금수 령을 내린 제너럴일렉트릭의 가스터빈용 회전자(로퍼)가 없이는 파이프라인이 쓸모 없이 되기 때문이다..
5천km의 파이프를 통해 필요한 압력을 가하는 펌프 (콤프레서) 시설에 미국산 회전자는 필수 불가결한 요소다.1백20km마다 41개소에 건설하도록 돼있는 펌프장에 소요되는 가스터빈은 모두1백20개로 이중 47개는 제너럴일렉트릭의 회전자가 있어야한다. 이 회전자는 영하 60∼70도까지 내려가는 북극지방에서도 작동할 수 있는 특수장비로 제너럴일렉트릭만이 기술을 독점, 서독·프랑스 등에 라이선스를 제공하고 있다.
때문에 「레이건」행정부는 미국에서 제조된 장비뿐 아니라 외국에 판매한 기술마저 이용하지 못하게 확대 금수조치를 내려 소련이나 서구가 자체기술로 이를 해결하러 한다해도 최소한 2∼3년 정도 파이프라인공사가 지연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그만한 기간이면 서구에서 다른 에너지원을 찾아내거나 눈을 돌리게 될 것이고 그럴 경우 외화조달길이 막힌 소련은 더욱 궁지에 물려 미국 등 서방국가들의 압력에 고분고분해 질 것이라는 견해다.
그러나 미국의 이러한 견해가 서구의 입장에서는「슈미트」서독수상이 『소련과의 계약은 꼭 이행하겠다』고 말했듯이 미묘한 마찰, 그렇지 않아도 대 동구정책으로 많은 잡음을 빚어왔던 미-서구관계를 더욱 긴장시키는 요소로 간주되고있다.
이러한 마찰은 결국 미-서구의 대소정책에 대한 인식의 차이, 서방의 경제협력이 없으면 소련체제가 파탄에 이를 것으로 보는「레이건」 행정부의 인식과 대 동구 경제협력을 통해 긴장을 완화해 나갈 수 있다는 평화공존의 인식의 기본적 발상 차이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극복하기는 당분간 힘들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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