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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동포 작가 강준식 씨가 본 「소련 속의 교포」실태(1) 사할린 동포의 제 1거점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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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중앙일보사는 재미교포작가 강준식 씨(35)를 소련으로 보내 그곳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교포의 실태를 취재했다. 71년 서울대 문리대 불문과를 졸업했으며 신춘 문예소설부문 당선작가이 한 강씨가 다녀온 곳은 소련극동지구의 최대도시인 하바로프스크 시 지난 5윌20 일부터 10일간 그곳에 머무르며 꿈에도 고국귀환을 그리며 애태우는 교포의 실상을 보고 왔다. 소련동부지역에 살고 있는 동포의 오늘, 조국의 남북을 바라보는 그들의 눈길, 2세들의 교육, 종교관, 조국에의 귀환을 갈망하는 애뜻한 향수····.소련교포의 이 모든 모습을 연재로 소개한다.
불라디보스토크와 함께 소련 극동지구 최대도시의 하나인 총인구 56만3천2백 명, 면적 4백평방km의 하바로프스크 시는 교통의 요충지이면서 역사적으로 우리 한국인들과도 깊은 연고가 있는 곳이다.
현재 3천명 내외의 한국인들이 살고 있는 하바로프스크는 보다 나은 생활환경을 찾아 육지로 이주해오는 사할린동포의 제l거점이 되어있다. 새로운 이주자들은 증가 일로에 있다. 주로 1977년 이후 이곳으로 대거 진출해온 사할린동포는 현재 6백 명에 이른다.
한겨울이면 영하 3O도까지 내려가는 아무르 강(흑룡강)연안의 이 도시가 해풍을 받아 얼마쯤 따스하다는 남 사할린의 유즈노 사할린스크, 코르사코프, 홀롬스크, 돌린스크 (이상 교포집약 지) 시보다 나을 것도 없건만 이들이 점차 이주해오는 이유는 이쪽이 의료·교육·문화 시설이 보다 양호하고 더 넓은 대륙에서 살고 싶다는 심리가 작용하는 때문이라고 전 사할린 교포신문「레닌의 길」의 기자였던 Y씨(67)는 말했다.
이곳은 사할린과 북한의 연결통로로서 북한 적 교포들은 나호트카 북괴영사관의 강력한 입김아래 있다. 지역별로 학습 조가 편성되어 있으며, 매년 순회업무를 실시하는 북괴영사관 직원들에게 각 조장은 교포들의 동태를 일일이 보고하도록 되어 있다 . 비 협조자에 대한 통제는 북한 땅의 일가친척을 보복하는 것으로써 유지된다. 소수민족의 융화정책을 실시하고 있는 소련정부가 특별히 한국인들을 박해하고 있다고는 볼 수 없다. 하바로프스크 출신의 한국인 가운데는 소련육군중장까지 올라간 김 모씨가 있고 한국인여의사들과 대학교수, 그러고 모스크바까지 진출한 최고급 과학자들도 있다.
그러나 대 부분 육체노동자로 징용 당해 왔던 교포1세들의 직업은 농업, 건축토목공사, 하역 자` 상점점원, 광부, 이발사, 재단사, 용접공, 페인트 공, 정비공 등의 블루칼러가 주류였다. 이들은 지금 연로한 탓으로 은퇴해 있는 경우가 많다. 정년은 남자의 경우 60세며, 지난 25년간 줄기차게 노동해 왔을 경우 월l백20 루불 (한화 약12만원) 의 국가 연금을 탈수 있다. 『「레닌기치」라는 한글신문을 아십니까?』 하바로프스크 조선어 방송직원이며 문필가인 고모 씨(52)가 내게 물었다.
1926년에 창간되어 현재 5만 부의 독자를 갖고 있다는 이 한글신문은 타슈켄트시 발행의 한글화보 「소련여성」지와 함께, 내가 하바로프스크 국제공항에 도착했을 때 『소련 돈 있습네까?』라고 유창한 한국어로 물어오던 소련 여세관원이 집어준 바로 그 한글신문이 수북이 쌓여 있어 눈길을 끌었던 것이다. 이 신문들은 북한발행이 아니었다. 소련의 교포들이 만들어내고 있는 한글 일간지와 주간지였다.
러시아어를 어설프게 번역한 듯 이 한글 문장은 내가 한국문화권에서는 결코 접해본 일이 없었던 독특한 문장으로서 신선 감이 없지 앉았다. 『현재 알마아타 시에서 발행되고 있는 「레닌기치」지는 원래 이곳에서 창간되었지요』고씨의 말이다.
하바로프스크는 한글신문이 창간 될 정도로 한때 한국인들이 많이 살았던 지역이다.
1930년「조선극장」과 함깨 이 신문사가 중앙아시아의 알마아타 시로 옮겨가기 전까지는 소련 내 한국인들의8∼9할이 바로 이 하바로프스크 일대에 살고 있었다. 그런 흔적의 하나로는 지금도 하바로프스크의 도심에서 지난날 붉은 전쟁의 영웅칭호를 얻은 한 한국계 소녀병사를 기념하기 위한 「김유천(Kim Yu Cheon)가」가 「카를마르크스 가」와 나란히 놓여 있다는 데서도 엿볼 수 있다.
이 지역의 한국인들은 l930년께「스탈린」의 명령에 따라 중앙아시아 쪽으로 집단 이주되었다. 타슈켄트. 알마아타 및 카자흐일대가 한국인들의 밀집지역. 현재 소련 땅에 살고 있는 우리 교포들의 총인구는 79년 소련당국의 공식인구조사통계에 따르면 38만9천명이나 50만 명 설 1백만 명설, 백50만 명 설의 세 설이 나와있다.
3천명 내외의 하바로프스크 현 한국인가운데 6백 명은 사할린 출신이고, 1천명 가량이 1946∼48년 소련과의 노동계약에 의해 북한으로부터 반 징용 당해온 사람들이며, 나머지는 중앙아시아로의 집단 이주 이후 만주 등지를 경유하여 해방 전에 이쪽으로 흘러 들어온 속칭 「고려인」들이다.
이들은 소련국적, 북한 국적, 무국적의 세가지 형태가 있다.
KBS 사회 교육 국을 통해 얻은 주소로 내가 찾아가 본 김 모씨의 경우를 보자.
1947년 나진에 있다가 소련으로 징용 당해온 충청도출신의 김씨는 올해 60세로 은퇴했으나 그 동안의 과로 때문에 생긴 신병을 치료하러 요양소에 가 있었기 때문에 내가 찾아갔을 때는 부재중이었다. 나를 맞아준 이는 김씨의 부인이었는데, 그녀는 북한 회령 여자였다.
그녀가 며칠 후 내게 털어놓은 고민은 소련 적을 취득하고 있는 두 아들과는 달리, 현재 북한 적인 그들 부부의 적을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금년 3월말 KBS 의 단파방송을 통해 그녀의 남편은 남한의 가족을 찾게되었다. 아직 생존해있는 고령의 부모를 찾아 뵙겠다고 입버릇처럼 되뇌고 있는 남편은 그러기 위한 제1보로 북한공민증을 포기하기로 결심했다는 것이다 그녀는 남편의 갈망을 이해한다 그러나 북한공민증을 포기 하 면 북에 남아있는 친정이 낭패를 본다는 것이 그녀의 고민이었다 그녀의 형제들은 북의 당원이다 남편을 따를 수도, 친정을 따를 수도 없는 그녀의 곤경은 남북분단의 슬픔을 그대로 증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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