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얍 ! 얼굴 옆차기 … 센서 즉각 감지 "2점이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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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1

앞돌려차기가 상대의 복부에 꽂힌다. 발등의 센서와 몸통 보호대의 센서가 순간적으로 반응한다. 전광판에는 공격한 선수의 점수가 1점 올라간다. 이번에는 내리찍기가 얼굴을 때린다. 발바닥에 부착된 센서가 헤드기어의 센서와 부딪치는 순간 2점이 올라간다. 심판들은 점수에 관여하지 않는다.

#2

선수들이 격렬하게 발차기를 주고받는다. 부심도 부지런히 포인트 버튼을 누른다. 예전 모습과 비슷하다. 하지만 부심 모두가 유효타격으로 인정해도 점수가 올라가지 않는 경우가 눈에 띈다. 센서가 감응하지 않은 것이다. 센서가 확실한 타격 부위와 강도를 읽지 못하면 점수로 연결되지 않는다.

세계태권도연맹(WTF)이 20일 경희대에서 전자보호장구(전자호구) 업체 선정을 위한 시연회를 열었다. 판정 시비라는 고질병을 치료하기 위한 임상실험이다. 이날 시연회에는 한국과 미국.오스트리아 3개 업체가 참가했고, 위의 두 장면은 업체들의 시연을 묘사한 것이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전자호구를 도입하기로 한 WTF는 5월 전자호구 특별위원회를 출범하고, 준비를 해왔다. WTF는 연말까지 업체를 선정하고, 내년 국내대회부터 전자호구를 통한 채점 방식을 도입할 계획이다.

?무엇이 달라지나=지금까지는 3명의 부심이 버튼을 작동, 2명 이상이 타격을 인정하면 점수가 올라갔다. 전자호구를 도입하면 심판의 영역이 없어지거나 상당 부분 감소하게 된다. 채점시스템이 완전히 바뀌게 되는 것이다.

경기 방식은 업체마다 차이가 있다. A업체의 제품은 점수를 기계에만 의존하도록 했다. 헤드기어에도 센서를 부착해 2점 득점까지 전자 시스템이 판단하게 된다. B업체는 사람의 영역을 많이 살렸다. 전자호구 센서와 부심이 동시에 타격을 인정할 때만 점수가 인정된다.

타격 강도도 체급별로 표준화된다. 일정 강도 이상 타격을 해야 득점이 인정되는 것이다. 즉 헤비급의 기본 강도는 플라이급보다 강하게 입력시킨다. 스치거나 살짝 갖다대는 정도로는 득점이 인정되지 않는다. 지금까지는 심판들이 임의로 정확한 타격을 판단했기 때문에 판정 시비가 일었다.

?선수.심판 적응이 문제=대한태권도협회 양진방 기획이사는 "기술적인 결함보다 기존 체제에 익숙한 사람이 더 큰 문제"라고 말했다. 이러한 지적에 대해 WTF 문동후 사무총장은 "불안 요소는 분명 있다. 하지만 판정 시비 문제를 더 이상 안고 갈 수 없는 것 아니냐"며 "지난 싱가포르 IOC 총회 이후 많은 태권도인이 판정 시비가 심각한 문제라는 것에 공감하게 됐다. 이제는 일을 밀어붙일 강력한 의지가 필요할 때"라고 말했다. 시연회를 찾은 많은 국내외 태권도 관계자들이 전자호구 위원회 위원들에게 "전자호구 도입이 대세냐"고 물었다. 위원들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대세다."

강인식 기자

*** 어떤 것인가

업체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긴 하지만 전자호구는 대체로 반응 센서가 부착된 헤드기어와 몸통 보호대, 그리고 타격 센서가 달린 글러브와 신발로 구성돼 있다. 글러브와 신발의 센서가 헤드기어와 몸통 보호대의 센서와 정확히, 그리고 일정한 강도 이상으로 맞아야 점수가 올라가는 원리다. 헤드기어에는 이마와 뺨 부분에 모두 센서가 달려 있고, 몸통 보호대에는 배 부분과 양 옆구리 등 세 곳에 센서가 있다.

펜싱은 오래전부터 전자호구를 채택해 왔다. 펜싱은 누가 먼저 찔렀나를 판별한다. 그러나 태권도는 시차를 두고 타격을 주고받아도 점수가 올라간다. 몸통 1점, 머리 2점 등 점수 분포도 다르다. 글러브에는 정권 부분에만 센서가 달려 있어 정확히 정권으로 몸통을 가격해야 점수가 올라간다. 당연히 손바닥이나 손등으로 쳤을 때는 점수가 올라가지 않는다.

태권도는 사방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직선으로 움직이는 펜싱과 달리 전자호구에 전선이 없다. 모두 무선으로 해결해야 한다. 그래서 전파 방해를 해결하는 것이 가장 핵심적인 기술이다. 국내에서는 이미 2년 전 고교 태권도 대회에서 전자호구를 사용한 바 있다. 당시에는 전파 방애, 과부하(프로그램이 신호를 모두 처리하지 못해 발생), 타격 강도 측정, 호구의 무게 등이 문제점으로 지적됐다.

*** 왜 도입하나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이후 미국 언론들은 "WTF가 한국 선수들의 승리를 위해 심판들에게 압력을 가했다"고 보도했다. 4년 후 문제는 반복됐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이 끝난 뒤 발표된 IOC 보고서에 따르면 태권도는 복싱.체조.다이빙 등과 함께 '심판 판정에 문제가 있는 종목'으로 분류됐다.

그리고 위기감은 현실이 됐다. 지난 8일 싱가포르 IOC 총회에서 IOC 위원들 중 일부는 공공연히 "태권도는 (심판 판정에 의해) 메달 색깔이 종종 바뀐다"고 말했다. 퇴출은 면했지만 불신은 지워지지 않았다.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2003년 독일 세계선수권대회에는 판정시비를 없애기 위해 '심판평가제'가 도입됐다. 운용 능력, 규칙 적용력, 점수 판단력 등을 평가해 심판 자격을 박탈할 수도 있는 강력한 인센티브 제도였다. 그러나 평가제도는 다음 대회부터 슬그머니 자취를 감췄다. 유의미한 편차가 나오지 않았고, 세부항목에서 이견도 컸기 때문이다. 해결책이 되지 못한 것이다.

지난해 구성된 WTF 개혁위원회의 결론은 '백약이 무효다'였다. 로비.압력이라는 말이 계속 나온다면 사람의 주관성을 배제한 전자 호구가 가장 확실한 대안이 될 것이라는 데 공감대가 형성됐다.

강인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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