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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 100대 드라마 ①정치] 7. 여야 정권교체와 김대중 집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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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8년 2월 25일 취임식장에서 김대중 신임대통령이 손을 들어 보이고 있다. 오른쪽은 퇴임하는 김영삼 대통령. <중앙포토>

▶ 1997년 12월 19일 새벽 광주의 감격. <중앙포토>

▶ 박정희 대통령에게 시달리다가 68년 5월 정계은퇴를 선언한 김종필씨가 5개월 후 미국 나들이를 위해 김포공항을 출발하기 전 부인 박영옥 여사와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중앙포토>

1970년대가 박정희의 드라마, 87년 6월항쟁이 국민의 드라마였다면 97년 대선승리는 김대중(DJ)의 드라마였다. 최초로 선거를 통해 여야 간에 정권이 교체됐다. 영남과 호남 간에 집권 지역 교체도 이뤄졌다. DJ는 민주화의 상징이지만 그가 민주주의를 충실하게만 집행한 것은 아니다. 언론을 통제했고 야당압박에 권력기관을 동원했다. 그는 흠이 많은 민주지도자였다.

박정희 혁명 돕고, DJ집권 돕고
‘아이러니 정치인’ 김종필

한국정치 40년에서 가장 오래 무대에 섰던 배우는 김영삼(YS)·김대중(DJ)·김종필(JP)이다. YS와 DJ가 드라마틱(dramatic)했다면 JP는 불가사의(mysterious)했다.

JP는 1961년 박정희쿠데타에 주요인사로 가담했다. 박정희 집권기간 많은 견제와 박해를 받기도 했지만 항상 그는 박정희의 후계자로 꼽혔다. 실제로 박 대통령은 그를 총리로 시켜놓고 83년께 자신은 하야할 생각이었다는 증언이 있다.

그런 JP는 97년엔 박정희의 최대 정적이었던 DJ와 손을 잡았다. 세월을 훌쩍 뛰어넘은 극적인 결탁이었다. JP가 DJ의 손을 뿌리쳤더라면 DJ는 집권하지 못 했을 것이다. DJ는 이회창씨에게 39만 표로 이겼는데 JP의 충청도에서만 40만 표 차를 건진 것이다.

JP는 자신이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은 한번도 가져보지 않은 것 같다. 그는 그래서 자기 존재에 대한 냉철한 판단 아래 ‘영원한 2인자’ 전략으로 갔는지 모른다. 전략은 성공했고 결국 그는 ‘조선 영조(英祖)이래 최장수 권력자’란 기록을 세웠다. 이 기록은 여간해서는 깨지지 않을 것이다.

JP는 DJP 연합정권을 유지하려 많은 애를 썼다. 비판을 받아가면서 DJ가 내각제 약속을 깨는 것을 눈감아 주었다. 그러나 결국 JP는 DJ 정권의 이념을 문제삼으며 갈라섰다. 그후론 이상하게 일이 꼬여갔다.

황혼의 JP는 지금 무대 뒤에서 지난 세월만을 곱씹고 있다. 2004년 4월 JP는 자민련이 몰락하면서 10선에 실패했다. 그는 “(죽기 전에) 서산을 붉게 물들이겠다”고 했다. “나에겐 지켜야 할 약속이 있다. 잠들기 전에 몇 마일을 더 가야 한다”는 프로스트의 시구를 인용한 적도 있다. 아직도 자신이 해낼 연기가 남아있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현재론 서산은 타오르지 않고 있고 길을 계속 가고 있는 모습도 없다. 자신이 떠난 충청도에서는 심대평이란 인물이 신당을 만든다고 시끌벅적하다. JP를 부르는 목소리가 희미하게 남아있지만 이미 인터넷 시대에 JP는 옛날의 JP가 아니라고 한다.
JP는 회고록 집필 권유를 뿌리치고 있다. 자신이 회고록을 쓰면 우리 역사에서 이미 정설로 굳어진 얘기들 가운데 많은 부분이 뒤집어지는데 뒤늦게 그런 분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어떤 부분들이 뒤집힌다는 것일까.

김정하 기자

‘DJ정부 중통령’ 박지원의 잿빛 말년

▶ 휠체어를 타고 왼쪽 눈을 붕대로 가린 채 법정에 출두하는 박지원씨. <중앙포토>

한국정치 40년에는 2인자들이 있었다. 이후락·차지철·장세동·박철언·김현철 등등. 그런데 노무현 정권에선 2인자가 없다고들 말한다. 그렇다면 한국정치 40년의 마지막 2인자는 누구일까. ‘김대중(DJ)의 박지원’이다.

그는 민주화운동하고는 거리가 멀었던 재미교포 사업가 출신이다. DJ가 어려웠던 시절 그는 DJ에게 줄을 대면서 정치권력의 세계로 진입했다. 그는 DJ의 대변인·특보·비서실장을 지내면서 권력을 키웠고 나중엔 ‘부통령’소리까지 들었다.

그러나 그는 여지없이 2인자들이 걸었던 길을 갔다. 황혼의 추락,시련의 말로다. 김대중 정권이 끝난 지 100여 일 만에 그는 대북송금 사건으로 구속됐다. 그러곤 현대 비자금을 받은 개인비리가 추가됐다. 법정에서는 그가 어떻게 부패에 관여했는지가 소상히 드러났다. 항소심에서 징역 12년형을 받을 때만 해도 그는 절망적이었다.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시력이 남아있는 한쪽 눈마저 녹내장의 거친 위협을 받았다. 그는 법정에서 “가족 곁으로 돌아가게 해달라”며 흐느꼈다.

그런데 대법의 ‘비자금 무죄’판결로 그는 기사회생했다. 그는 여의도 자택에서 은둔하고 있다. 그가 자주 만나는 유일한 사람은 DJ다. 그는 1주일에 2~3차례 동교동으로 DJ를 찾아가 나라 돌아가는 것에 대해 대화를 나눈다고 한다. 그는 “DJ가 노벨상 수상자로서 통일과 평화를 위해 활동하는 것을 도우며 여생을 보내겠다”고 말한다.

김정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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