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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주가 없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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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먹고 마시는 것도 문화생활의 하나다. 우리의 식생활문화는 그 동안 겉으로는 많은 변화와 발전을 거듭해왔다.
그러나 질적으로는 옛날과 같지 않다. 같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못 한 것 같다. 식단의 정성이 그렇고, 솜씨도 예외가 아니다.
우리의 삶은 겉으로는 번지르르 하고 충만스러워 보이지만 속으로는 실속이 없다. 멋도 잊어버렸다. 격조며, 운치도 없다. 그만큼 삶의 즐거움을 잃고 사는 셈이다.
지난주 말 본지 사회면에 소개된 어느 한 학자 댁의 가양주 「삼해주」를 보며 새삼 그런 느낌을 갖는다.
우선 재료들이 하나같이 자연 그대로다. 발효 (발효) 도 자연환경의 조건을 그대로 이용하고 있다. 방부제가 들었을 리 없다. 그 만큼 신뢰가 가는 것이다. 그 맛과 향훈은 도취의 경지를 넘어 감상의 경지인 것 같다.
고려시대 고문헌에도 소개된 전래주인 것으로 보아 천년도 넘는 비술의 명주다.
더구나 이 술은 오늘 어느 자리, 어느 누구의 기호 (기호) 에도 맞는다. 오랜 경험, 자연의 섭리에서 빚어진 순화의 맛 때문이다.
인스턴트식품, 유사식품, 화학 제제 식품, 가짜식품에 식상해온 우리는 신비로움까지 느낀다.
옛 사람들의 시속은 투박하고, 비과학적인 것 같지만, 그 속엔 눈으로 쉽게 계량할 수 없는 지혜와 합리적 경험주의가 함축되어 있다.
우리는 흔히 전통을 운위하지만 그것은 박물관이나 케케묵은 서고에 박제(박제)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더구나 옛것의 복사나, 재현도 아니다. 복사나 재현은 오늘의 감각과 척도로는 오히려 퇴영(퇴영)일 뿐이다.
「전통을 잇는다」는 뜻은 옛 미덕, 지혜, 그 고상한 정신적 가치의 맥락을 이어, 오늘의 삶 속에 융화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뒷걸음 질 치는 전통」이 아니라, 온고지신의 「앞으로 나아가는 전통」을 추구할 대 발전을 기약할 수 있다. 이 점에선 우리가 할 일은 너무도 많다. 웅대하고 장려한 일들만이 아니다.
우리의 일상을 윤택하게 만드는 작은 일에서부터 「전통 찾기」는 시작되어야 한다.
그 하나가「유구한 역사」와「고유문화」속에서 빚어진 우리 술, 곧 국주를 갖는 일이다.
프랑스 하면 브랜디, 영국은 스카치위스키, 미국은 버번, 소련은 보트카, 중국은 소흥주나 마오타이 주, 하다못해 이웃 일본도 정종과 같은 술이 있다. 남미엘 가도 선인장으로 담은 특유의 향토주가 있다.
근래 우리 나라도 포도주나 사과주를 개발해 평판이 괜찮은 것 같다. 국산양주도 가지 수가 적지 않다. 맥주도 마찬가지.
그러나 이들은 품평에 앞서, 외래주라는 점에서 자랑거리는 못 된다. 아무려면 원산지 양주에 비하랴.
물론 ,우리 술의 하나인 청주 류의 곡주나, 소주도 있다. 그러나 이런 술이야말로 「우리술」에 앞서 언제나 품질이 문제가 된다. 일설에는 방부제가 들었다는 얘기도 파다하다. 소주의 경우는 심한 두통과 같은 후탈이 아직도 말끔히 씻겨지지 않고 있다. 맛과 운치는 따질 겨룰도 없다.
모든 술은 제조과점에서 발생하는 퓨젤 (fusel) 유나 「아세트· 알데히드」와 같은 화학물질의 다과가 일차적인 품질결점의 척도가 된다. 미국 군인들의 근무규칙에도 『퓨젤이 많은 술은 마시지 말라』는 조항이 들어있을 정도다. 제조과정이 세련되고, 정성스러우면 이런 유독성물질은 줄일 수 있다. 구미의 이른바 양주들이 후유증이 덜한 것은 그 때문이다.
필경 우리 나라 소주도 증류를 제대로 잘 하면 후탈의 악명을 벗을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원가다. 그렇다면 소주의 값에 상·중·하의 층하를 두면 될 것이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연평균 한 사람이 38병(2홉들이)의 소주를 마신다는 통계도 있었다. 그런 대중 주 하나 오늘까지 마실만하게 제대로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까짓 소주가 문제가 아니다. 「88 서울올림픽」대비는 가로수나 운동장에 국한할 일이 아니다. 『이것이다』하는 국주도 한번 제대로 개발해 볼만하다. 술 얘기라고 하찮게 여길지도 모르지만, 문화의 깊이나 세련 도는 엄연히 술 속에도 있다는 사실을 숨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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