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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40)제77화 사각의 혈투 60년(58)|김영기|김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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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보기

종합 07면

『시대가 영웅을 만들어 낸다』는 말이 있다. 국내 권투에서 이 말은 너무나 실감이 난다. 서강일이 그렇지만 경량급의 김현 역시 10년만 뒤늦게 권투를 시작했더라면 세계 챔피언은 틀림없었으리라고 단언할 수 있다.
김 현은 특히『30초 권투』로 유명했다. 라운드마다 2분 여 동안 수비에 치중하다 마지막 30초를 남기고 마구 밀고 들어가 들 부수는 권투를 구사했다.
마지막에 화려한 인상을 남겨 채점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는 지능적인 권투를 벌인 것이다.
60년 말 프로에 데뷔, 74년 말 은퇴하기까지 15년간 1백31전이란 국내 최다 경기를 기록했다. 그의 75승(26KO)40패16무의 통산 기록은 이제까지 동양에선 일본의「피스튼·호리구찌」(1백38승24패14무), 화전(92승37패25무)에 이어 세 번째다. 특히 60년대 말부터 허버트 강과의 라이벌 전은 국내 팬들을 매료시켰다.
김기수가 세계 타이틀을 뺏기고 국내 프로 복싱이 침체의 늪 속으로 빠져 들어갈 때 이 두 라이벌의 대결은 복싱 붐 조성에 큰 역할을 했다. 모두 7차례나 대결했는데 김 현이 3승4패로 뒤졌다.
김 현과 허버트 강은 이웃 동네인 혜화동과 삼선 동에서 각각 어린 시절을 보내며 동네 주먹대장으로 묘한 인연을 맺고 있다.
5살이 위인 김 현은 고교(덕수상고)에 다닐 때 이미 꼬마대장인 허버트 강을 알았다는 것이다.
김 현의 고향은 황해도 장 연이었으나 6·25 사변 전에 남하했다. 그는 11남매(8남3녀) 중 막내인데 두 살 때 부친이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모친(2년 전 84세로 각고)은 5남3녀를 데리고 서울로 온 뒤 안 해 본 장사가 없을 정도로 뼈저린 고생을 하며 자식들을 키웠다.
그러나 막내 현은 동네의 주먹 대장으로 용맹(?)을 떨쳤다. 속이 썩다 못한 어머니는 동네의 유명한 프로 복서 이명근에게 현을 맡겼다. 이미 앞에서 기술했듯이『이 말썽꾸러기 자식놈에게 권투를 가르쳐 주어 선도해 주십시오』라는 것이 모친의 간절한 부탁이었다.
권투를 시각한지 꼭 50일만에 프로복서로 데뷔전에 나섰다.
60년 12월20일 서울 운동장 야구장에서 벌어진 강세철과「러시·메이온」(필리핀)의 동양주니어 미들급 타이틀 결정전에 앞선 오픈 게임에 출전한 것이다.
16세의 어린 복서 김 현은 4회전인 데뷔전에서 무승부를 기록했다. 이후 그는 1주일에 한번씩 경기를 갖기도 하는 등 링에 자주 올라 인기를 쌓아 갔다. 드디어 64년 12월 한국 밴텀급 챔피언 문창수에게 도전, 3회 KO승을 거두고 타이틀을 따냈다.
65년 7월에는 일본의「아오끼」가 보유하고 있는 동양 밴텀급 타이틀에 도전했으나 판정패로 실패하고 말았다. 그는 일본에만 12차례 건너가 모두 23명의 복서와 싸웠다. 69년 석종구를 판정으로 누르고 한국 페더급 챔피언이 된 뒤 n년 4윌 동양 페더급 챔피언인 일본의 「지바」를 장 충 체육관으로 불러들여 통쾌한 2회 KO승을 거두고 타이틀을 따냈다.
김 현과 허버트 강의 라이벌 전은 69년부터 시작됐다. 68년 9월 허버트 강이 동경에서 일본의「사이또」를 2회 KO로 누이고 타이틀을 따오자 극동 프로모션의 전호연 회장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 라이벌 전은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음에도 김 현은 대전료로 40만원 이상을 받아 보지 못했다. 작고한 김경호 매니저로부터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한 것이다.
그의 생애 최고의 대전료는 72년 9월 괌도에서 벌어진「어니·크루즈」와의 동양 타이틀 4차 방어전에서 받은 7천 달러다. 김 현은 73년 1윌 명고옥에서 가진 6차 방어전에서「우다가와」에게 판정패, 타이틀을 잃으면서 하향 길에 접어들었다.
이에 앞서 72년 12월 이창길과 함께 복싱의 메카라 할 수 있는 뉴욕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 진출했다. 동양 페더급 챔피언이었던 그는 세계 랭커인「월터·세리」와 대결했으나 판정패했다. 문자 그대로 백전 노장인 김 현은 74년 10월5일 최문석과의 은퇴경기에서 턱에 상처를 입고 3회 TKO패, 한 많은 링을 떠나고 말았다.
김 현은 현역 시절부터 양복점을 비롯, 다방·술집 등 여러 업종에 투자했으나 결과는 빈털터리였다. 은퇴 이듬해인 75년에는「김 현과 더 펀처즈」라는 6인조 보컬 그룹을 구성, 신촌과 종로의 술집에서 직접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이 역시 별 볼일 없어진 뒤 76년부터 충남 방적 이종성 사장의 배려로 예산에 체육관을 설립, 지난해까지 후진을 양성하기도 했다. 지난 겨울부터 서일 실업 노경하 사장의 후원으로 서진 체육관(둔촌동 아파트 앞)을 차려 인 여 명의 관원을 가르치고 있다.
21세에 결혼하여 2남2녀의 아버지인 김 현은『자식들에겐 절대로 권투를 안 시키겠으며 죽을 매 유언을 남겨서 후손들에게는 권투를 못하게 하겠다』고 말할 정도로 권투에 대해 신경질적인 혐오감을 갖고 있다. 화려한 갈채 뒤엔 허무만 남는 것인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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