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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취재일기

눈 감으니 비로소 보이는 것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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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박혜민 기자 중앙일보 팀장
안성식
안성식 기자 중앙일보 차장
지난 8일 서울 종로구 ‘우리들의 눈’ 갤러리에서 열린 시각장애인을 위한 요리교실. [안성식 기자]
박혜민
문화·스포츠·섹션부문 기자

눈을 감으니 청각과 후각, 촉각 등 다른 감각들이 예민해졌다.

 “파와 당근, 오징어는 채 썰어야 해요.”

 도마에 놓인 당근을 손으로 만져서 모양을 파악한 후 칼로 자르기 시작했다. 당근은 생각했던 것보다 딱딱했다. 오징어는 물렁하고 질겨서 칼에 힘을 더 많이 줘야 했다.

 지난 8일 서울 종로구 ‘우리들의 눈’ 갤러리. 기자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요리연구가와 함께 음식 만들어 보기’ 행사에 참여했다. 결혼 17년 차 주부, 웬만한 음식은 눈 감고도 만든다고 자부해왔지만 실제로 눈 감고 요리를 하는 건 생각했던 것과는 좀 달랐다. 이날 만든 음식은 파전, 골뱅이무침, 돼지고기찜이었다.

 “음식이 완성됐습니다. 앞에 놓인 접시에 담아드릴 테니 맛있게 드세요.”

 ‘눈 감고 젓가락질하기’는 음식 만들기 못지않게 난코스였다. 음식을 얼마나 집었는지 알 수 없었다. 조금 맛만 보고 말았다.

 1시간30분가량의 행사가 끝나고 눈을 가렸던 안대를 벗었다. 시각이 돌아오자 예민해졌던 청각과 촉각이 다시 둔해지는 듯했다. 갤러리 벽에 붙어있던 그림들도 눈에 들어왔다. 모두 시각장애인들이 그린 그림이라고 했다. 보지 못하면서 그림을 그리다니.

 “그림은 눈으로만 그리는 게 아닙니다. 오감을 모두 사용합니다. 시각장애인의 작품은 더 창의적이고 신선합니다. 비시각장애인보다 감각이 예민하고 상상력이 뛰어나기 때문이죠.”

 이 프로그램을 기획한 ‘우리들의 눈’ 엄정순 대표는 보지 못하면서 그림을 그리는 게 가능한 거냐는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이날의 요리 강의는 사진찍기, 연극하기, 와인시음 등 총 17회로 이뤄진 시각장애인을 위한 예술 프로그램 중 하나였다. 화가인 엄 대표가 이런 프로그램을 마련한 이유는 시각장애인들이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기회가 적다는 게 안타까워서라고 했다.

 “시각장애인들도 요리를 할 수 있나요?”라는 질문에 행사에 참여했던 시각장애인 김경식씨는 “요리 잘하는 사람 많아요”라고 답했다. 시인인 그는 6년 전부터 사진을 찍고 있다. “‘느껴보다, 만져보다, 안아보다, 들어보다’라는 말이 있잖아요. 볼 수 있는 방법은 많아요. 시각장애인들이 비시각장애인들보다 열등하다거나 비정상이라고 보는 건 편견입니다.”

 눈을 감았을 때 느낀 것은 불편함이라기보다 다른 감각이 깨어나는 느낌이었다. 눈에 보이는 것에 휘둘리지 않고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능력이 살아났다. 시각장애인의 애환을 취재하러 요리교실을 찾았던 기자는 그간 무심히 지나쳤던 감각과 능력을 다시 찾아내는 선물을 받고 돌아왔다. 그렇게 장애인에 대한 내 안의 편견도 깨졌다.

글=박혜민 문화·스포츠·섹션부문 기자
사진=안성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