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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31)제77화 사각의 혈투 60년(49)|김영기|김진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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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해방 후 중량급 복서 중 스피드가 가장 뛰어난 선수를 꼽으라면 나는 아마, 프로를 막론하고 서슴없이 김진국을 지적할 수 있다.
서울 토박이인 그는 해방 후 서울 권투구락부에서 본격적인 권투를 배워 막 바로 프로에 뛰어들었다.
특히 그는 바람을 일듯 어찌나 빠른지 마치 물찬 제비를 연상시켰다. 또 로프를 기막히게 이용하는 테크닉을 갖고 있었다. 「무하마드·알리」가 70년대에 사용한 것을 이미 30년이나 앞서 시작했다고 할까.
김명석 관장이『자네는 권투를 하는 것인가. 서커스를 하는 것인가』라고 말할 정도로 그는 로프를 이용한 권투를 구사했다. 46년 봄 플라이급으로 데뷔전에 나가 김광수와 싸워 4회전에서 판정패했다. 그러나 이후 펀치는 없으나 뛰어난 스피드로 연승을 거두며 인기복서로 성장하면서 체중이 불어 라이트급까지 올랐다. 49년 봄에 미들급 강자 송방헌과도 대결했으나 판정패했다.
51년 1·4후퇴 대는 대구로 피난, HlD(범죄수사대)문관으로 들어가 권투를 계속했다. 이듬해 그는 인천으로 파견돼 그곳에서 주로 미군선수들과 1년 동안 10여 차례 대전을 벌였는데 53년 서울 한미합동헌병대로 배속되면서 복서생활의 피크를 이뤘다.
이해 8월 서울 권투구락부 주최, 육군형무소 후원으로 김진국과 강세철의 대전이 동대문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벌어졌다. 6·25사변 후 두각을 나타낸 강은 웰터급 챔피언으로 펀치력과 맷집이 뛰어나 한참 인기상승의 복서였다. 그러나 김은 마치 고양이가 쥐를 어르듯 처음부터 치고 빠지면서 일방적 우세였다.
강은 무수히 얻어맞으면서도 용케 버텨 나갔다. 이 대전을 주선했던 나는 흥미를 잃은 데다 날씨가 워낙 더워 운동장 구석의 나무그늘을 찾아 빨리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그런데 7회 들어 갑자기 와! 하는 관중의 환호성이 터져 나는 강이 주저앉은 것으로 알고 관중을 헤치며 링 쪽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박순철 주심이 강의 손을 높이 쳐들어 승리를 선언하고 있었다.
김이 마구 밀어붙이다 강의 카운터 볼로 한방에 녹다운이 됐다는 것이다.
그러자 김이 소속해 있는 한-미 합동헌병대의 조모란 중위가 본부석으로 달려와 주심의 카운트가 너무 빨랐다며 항의했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약이 오른 조 중위는 이날 밤술을 마시고 집으로 돌아가던 박 주심을 조사할 것이 있다며 연행, 하룻밤 고생을 시킨 뒤 풀어주는 촌극을 벌이기도 했다. 김진국은 조성구와 두 차례 경기를 벌여 모두 승리했다. 53년 9월 서울운동장에서 전국 프로 권투선수권대회가 열려 라이트급에선 김진국이 강만호 김경호 김재덕을 차례로 이겨 결승에서 조성구와 대결했다.
조는 전해에 인천에서 김에게 패한 것이 억울한데다 웰터급의 하드 펀처 강세철을 피하기 위해 체급을 내린 것이다. 그러나 조는 오른쪽 눈 위를 크게 찢기는 곤욕 속에 판정패했다. 이해 12월 김진국은 강세철(웰터급), 김준호(페더급), 이일영(플라이급)등과 함께 우여곡절 끝에 필리핀을 원정하게 됐다. 박순철이 단장 겸 감독이고 박은섭 김명석이 코치인 한국선수단은 여권 발급이 늦어져 대회를 며칠 안 남기고 부랴부랴 떠났다.
더욱 어처구니없는 것은 비행기표도 편도만 끊었을 뿐 돌아오는 표는 필리핀에서 버는 돈으로 사자는 무모한 계산이었다. 이 대회는 동양 권투연맹(OBF)창설기념으로 필리핀 태국 일본 한국 등 4개국 친선경기였다. 그러나 한국선수들은 생전 처음 타 보는 비행기에다 찌는 듯한 더위로 모두 첫 경기에서 추풍낙엽처럼 떨어져 나갔다.
이같이 되자 필리핀 측은 모두 맥없이 패한 한국선수들을 다시 흥행에 내세우려 하지 앓았다. 그래서 한국선수단은 돌아올 비행기표 조차 마련 못하고 야단이 난 것이다. 김진국은 한국영사관을 찾아가 영사에게 서울에서 갚기로 하고 돈을 꿔 김명석 코치와 먼저 귀국하는 난센스를 빚었다.
김진국은 이듬해 봄 이명근과 은퇴경기를 갖고 25세의 한참 나이에 현역생활을 청산했다. 복서로서 명성도 날린 데다 권투에 싫증이 났던 것이다. 김진국은 55년부터 심판으로 활약하다 66년 극동 프로모션을 설립했다. 이와 함께 동양미들급 챔피언이 된 최성갑과 멕시코 올림픽 동메달리스트로 프로로 전향한 장규철을 지도하기도 했다.
70년에 그는 극동프로모션을 전호연에게 넘겨줬다. 『링의 대부』로 불리는 전호연의 극동 프로모션은 이같이 생겨난 것이다.
김진국은 이후 심판으로 맹활약, 지난 80년11월20일 동경에서 벌어진 WBA주니어라이트급 챔피언「우에하라」-「에르난데스」(파나마)의 타이틀매치 주심으로 나서는 등 김광수와 함께 심판진을 이끌어 가고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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