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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 교수 일「송하정경숙」강연|"일본은 큰 도깨비가 될 생각 말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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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동경=신성순 특파원】다음 글은「축소지향 적 일본문화론」을 제기, 일본의 매스컴과 지식인사회에 적잖은 파문을 던진 문학평론가 이어령 교수(이대)가 귀국 전날(5월29일)송하정경숙에서 강연한 내용의 일부를 초록한 것이다. 송하정경숙은 일본의 엘리트를 양성하는 아카데미로「갤브레이트」「보겔」등 세계적 석학들이 초빙되어 강연을 하기도 한 곳이다.
『작은 것이 좋은 것이다』(Small is Beautiful)-이 말은 탈 산업사회를 향해 나가고 있는 세계의 유행어다. 지금까지 서구문명이 지향해 온 것은 거대주의였고 팽창주의였다. 말하자면「큰 것」을 존경하는 문화였다. 그러나 오일쇼크 이후 사람들은 대형차보다는 소형차를 타는 것이, 그리고 큰 저택보다는 작은 집에서 사는 것이 훨씬 편안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공간을, 자원을, 에너지를 절약해야만 살 수 있는 시대가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거대주의보다는 축소주의문화의 전통을 가진 나라가 더 유리해지는 시대라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데 거의 1천년 전에 일본의 여류문인 청소납언은『작은 것은 무엇이든 모두 모두 다 아름답다』라고 적고 있다. 단지 17문자 밖에 안 되는 하이꾸 문학을 보라.
넓은 방을 두고 일부러 사첩반의 작은 다 실을 만들어 그 안에 7, 8명이 들어가 무릎을 꿇고 다를 마시는 다도를 생각해 보라. 조그마한 쌀 한 톨이나 깨알에 수 백자의 글씨를 써넣기도 하고 개자씨 만한 인형을 만들어 놓고 좋아하는 일본인들은 옛날부터 웬일인지 축소지향 쪽으로 그 문화를 발전시켜 왔던 설화에도 것이다.

<설화에도 나타나>
그렇기 때문에 일본의 설화에서도 가장 인기가 있는 것은 새끼손가락 만한 난쟁이가 커다란 도깨비를 이기는「일촌법사」유형의 이야기인 것이다. 상품을 봐도 그렇다. 평안 조 시대의 일본인들은 부채를 접는 쥘부채로 개발하여 중국과 유럽에 팔아 왔고 강호시대의 일본인은 또 등을 접는 등으로 고안해서 들고 다녔고, 소화시대에는 양산을 2단, 3단으로 꺾어 축소시키는 오리다따미 식 우산을 생각해 냈다.
일본이 전후에 경제부흥을 이룩한 배경에는 이「축소문화」가 교묘히 작용했던데 그 원인의 하나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맨 처음 테이프 레코드를 만든 것은 독일이었지만 일본은 그것을 들여다 몇 분의1의 소형으로 축소시켜 가정용으로 개발, 세계시장에 역수출했다. 물건만이 아니라「테이프·레코드」라는 말 자체까지도 3분의 1로 줄여서 일본인들은「테레코」라고 한다.
컴퓨터를 만든 것은 카우보이의 초원을 달리는 미국인이었지만 그 기능을 일부 떼어 내 작은 탁상용 계산기를 처음 개발해 내고 그것을 손목시계 위에까지 올려놓은 것은 일본인들이었다.
일본제의 카메라, 디지틀 시계, 소형차, 그 모든 것은「작은 거인」일촌법사의 상품들이다. 일본식 경영도 축소지향의 산물이다.
즉 일본열도를 3백∼4백으로 작게 쪼개서「번」을 만들어 지배했던 덕천시대의 통치 법을 회사관리기술로 바꿔 놓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일본어에서『안다』는 말과『쪼갠다』는 말은 같은 것으로 하나는「와까루」이고 또 하나는「와깨루」다. 모르던 것도 작게 쪼개면 알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소니」경영이나 송하전기의 운영방식은 모두 회사가 아무리 커져도『작게 쪼개라!』는 원칙이다. 일본이 산업 로보트의 왕국이라 하지만 대형 로보트의 기술은 여전히 미국에서 배워 오고 있다. 그것을 쪼개어 작은 로보트를 생산한다.
카메라도 역시 일본인이 넓은 하늘에 쏘아 올린「해바라기」위성에는 일본제 아닌 미제가 장치돼 있다. 위성자체의 6할이 모두「메이드·인·USA」다.
그러고 보면 일본문화는「끌어들이기 문화형」이라고 할 수 없다.「내」가 밖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밖에 있는 것을「내」안으로 끌어들이려고 한다. 그래서 멀리 있는 넓은 자연을 가까이 에 있는 좁은 집안으로 끌어들인 것이「고산수」라 부르는 일본특유의 정원양식이며, 산야에 있는 거수를 화분 안에 축소해 방안으로 가져온 것이 분재인 것이다.
하늘에 있는 신까지도, 이를테면 밖에 있는 신사까지도 트랜지스터라디오처럼 조그맣게 줄여 가미다나로 만들어 선반 위에 올려놓기까지 한다. 신화를 봐도 마찬가지다.
중국은 중화사상을 그 주변의 나라에 열심히 전파해 왔고, 구미각국은 기독교를 선교하기 위해 일곱 바다로 나갔다. 한국만 해도 일본에 한자와 불교를 비롯해서 무엇인가 남에게 문화를 가르쳐 주려고 애써 온 역사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일본만은「가르치는 것」보다 언제나「배우는 것 에 더 몰두해 온 문화적 성향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밖에 나가면 미아>
그리고 몸 가까이 에 있는 것이면, 손에 잡히는 것이면, 샅에 직접 와 닿는 것이면, 무엇이든 기막히게 잘 알고 있는 것이 일본인들이지만, 일단 자기밖에 있는 넓고 먼 공간이나 추상적인 세계에 나가면 미아처럼 돼 버린다. 뿐만 아니라 그 의식구조나 행동양태까지도 돌변하는 것을 우리는 많이 보아 왔다. 일본인을 사첩반의 방에서 넓은 바다 밖으로 내놓으면 왜구와 같은 존재가 돼 버린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끌어들이기 문화」에서는 자연히「우찌」와「소또」(밖)의 독 톡한 관념과 괴리가 생겨나게 마련인 것이다.
입춘 전날밤 일본인은 지금도 콩을 뿌리며 커다란 소리로『오니와 소또! 후꾸와 우찌』 (귀신도깨비는 밖으로, 복 단지는 안으로)라고 외치지만 이러한 목소리는 일본의 사회, 일본의 어느 역사에서도 들을 수가 있는 것이다. 일본인들에 있어 자기나라의「밖」에 있는 공간은 도깨비들이나 사는 공간이다. 그러나 일본인들이 살고 있는 자기 나라의「안」에는 언제나 복 단지로 그득 차 있어야 한다. 이「안」과「밖」의 혹심한 단절감은 강호의 쇄국시대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일본에서 광도의 원폭피해자의 참상을 그린 영화는 지금까지 33편이나 된다고 하지만, 아주 최근까지
한국인의 피폭자이야기를 담은 영화는 단 한편이 없었다고 한다. 세계의 휴머니즘에 호소하는 원폭의 증언까지도 이렇게「안」과「밖」이 분명한 것을 보면 다른 것은 더 따져 볼 필요가 없을 것이다. 같은 일본인들끼리라 할지라도「안」의 집단에서(이것을 일어로는「나까마」라고 부르지만)일단 벗어나기만 하면「외인」과 다름없이 배척 당하고 만다.
그런 사람을 일본인들은「무라하찌부」라는 독특한 말로 부르고 있다.
결국 일본인은「안」에서는 잘해 나가지만, 「바깥」의 무대에서는 언제나 3S족이 되고 만다.
즉 국제회의에서 말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심상 파(Silence), 무엇인가 물어도 그냥 멋 적게 웃고만 있는 미소 파(Smile),의 의중에 꾸벅꾸벅 졸고 있는 낮잠 파(Sleep)는 모두가 일본인이라는 평이 그것이다. 그렇기 때문에『일본인은 세계를 향해 가슴을 열지 않고 있다. 일본인이 국제회의에서 말수가 적은 것은 외국인에게 정보를 흘린 자를 처형한 쇄국시대의 문화유산이다』라고 말하는 외국평론가들도 많다.
일본은 세계의 차원에서 외교를 하지 않고 오로지 좁은 자국의 이익만을 무대로 삼고 있다는 비난도 있다.

<국제회의선 "3s">
73년의 오일쇼크 이후, 석유의 공급이 어렵게 되자, 일본은 자유주의 국 가운데 제일 먼저 친 이스라엘정책을 버리고 친 아랍 적인 성명을 발표함으로써 하룻밤에 그 입장을 바꿔 버리고 말았다.
넓은 데서 좁은 곳으로, 밖에서 안으로, 큰 것에서 작은 것으로, 이렇게 수축할 때에는 그 문화가「꽃꽂이」처럼 아름답지만 그 반대방향으로 나갈 때에는, 즉 일본인이 부르는 국가처럼「작은 모래알이 바위」가 되려고 할 때에는 무엇인가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진다. 풍신수길은 축소방식으로 천하를 얻었지만 거대주의로 정책을 바꾸어 한국을 침공한 후 멸망했다.
이와 똑같은 일이 명치유신이후에도 벌어져 한국만이 아니라 일본인 자신이 대 일본제국의 확대주의문화의 희생자가 된다. 나라이름 위에「대」자를 붙이면 무엇인가 위험한 일이 벌어진다. 지금도 또 일본인들은「경제대국」이라는 말을 애용하기 시작하고 있다. 전후의 잿더미에서 일본을 일으킨 것은 확대지향의 식민지정책을 버리고「축소지향」으로 나갔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엔 다시 자신이 붙고 GNP 세계 제2의 나라가 되면서 다시 확대주의로 나가 경제마찰을 비롯, 국제적인 알력을 서서히 자아내기 시작하고 있다.
일본인을 위태롭게 하는 것은 땅 밑에 있는 지력이 아니라 마음 밑에 깔려 있는 과잉 「자신」이다 (편집자주=「지진」과「자신」은 일본발음으로는 똑같은「지신」이 됨). 일본이 확대주의로 나갈 때 맨 먼저 피해를 본 것은 이웃 나라인 한국이다. 일본 자신이나 이웃나라를 위해서도 일본은 축소지향의 전통을 버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작아지려 할 때 일본은 커지고, 커지려 할 때 일본은 쇠망할 것이다. 그러므로 일본문화에 대한 나의 충고는 큰 도깨비(오니)가 되지 말고 작은「일촌법수」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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