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부 주임 꿰찬 저우언라이, 황푸에 붉은물 주입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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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호 29면

황푸군관학교 정치부 주임 시절의 다이지타오. 1924년 봄 광저우. 20여 년 후, 국민당의 패배가 확실해지자 “책임이 크다”며 자살로 삶을 마감했다. [사진 김명호]

예외도 있지만, 동물들은 패거리를 져서 몰려다닌다. 인간도 동물이다 보니 어쩔 수 없다. 몇 명만 모여도 네 편 내 편 패가 갈리기 마련이다. 황푸군관학교도 국·공 양당이 연합해서 만든 조직이라 금세 패가 갈렸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399>

만약이라는 단서가 붙지만, 초대 정치부 주임 다이지타오(戴季陶·대계도)가 황푸를 떠나지만 않았더라면 황푸군관학교의 분열은 불가능했다. 다이지타오와 장제스(蔣介石·장개석)는 청년 시절부터 보통 사이가 아니었다. 취향도 비슷했다. 일본 유학 시절 쑨원(孫文·손문)의 심부름하던 일본여인과 다들 가깝게 지냈다. 허구한 날 셋이 몰려다니며 국수도 사먹고 남녀 혼탕도 함께 다녔다. 누가 제의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방값도 줄일 겸 셋이 한 방에 살자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사이로 발전했다.

일본에서 귀국한 장제스와 다이지타오는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정치건달 비슷한 생활을 했다. 일본 시절 두 사람의 부인이나 다름없던 여인이 아들을 안고 나타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여인은 아들의 아버지가 다이지타오라고 주장했다. 다이지타오는 신혼이었다. 장제스는 “내 호적에 애 이름 한 줄 써 넣으면 된다”며 친구를 안심시켰다. 그것도 말만 그렇게 한 게 아니라 실제로 행동에 옮겼다.

장제스의 차남 장웨이궈(蔣偉國·장위국)가 “친아버지가 누군지는 나도 정확히 모른다. 엄밀히 말해서 남들이 그렇다니까 그런가 보다 하는 거지, 아버지가 누군지 정확히 알고 태어난 사람이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라. 나는 친아버지가 장제스건 다이지타오건 상관없다. 모두 자랑스러운 아버지들”이라며 뭇사람의 폭소를 자아낼 때까지 장웨이궈가 다이지타오의 아들일지도 모른다는 소문은 수십 년간 항간의 화젯거리였다.

거리에서 밥을 먹는 황푸군관학교 학생병들. 1925년 1월 광저우 인근.

군관학교 교장과 정치부 주임에 취임한 장제스와 다이지타오는 교양인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장제스는 원래 전통적인 사람이었다. 사제지간의 감정과 소통을 중요시했다. 1기생이었던 중공 원수 쉬샹첸(徐向前·서향전)의 회고에 의하면 매주 한 번씩 학생 10여 명과 단독 면담을 했다고 한다. “장제스는 일본 유학 시절 관상술을 익힌 적이 있었다. 면담 방법이 특이했다. 꼿꼿이 앉아 학생이 하는 말을 들으며 얼굴을 관찰했다. 용모가 울퉁불퉁하되 단정해 보이고 눈이 반짝거리는 학생에게 호감을 느꼈다. 이런 학생들은 따로 관리했다.”

1948년 후배 린뱌오(林彪·임표)에게 투항한 1기생 정둥궈(鄭洞國·정동국)도 말년에 장제스와의 첫 번째 면담을 회상했다. “얼굴을 어찌나 뚫어지게 바라보는지 사람을 긴장시켰다. 교장은 고향 사투리가 심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더 긴장했다. 몇 분에 불과했지만, 면담이 끝나면 온몸이 땀투성이였다.”

장제스는 수시로 학생들을 불렀다. 졸업 후 임용에 참고하기 위해 사상과 취미, 장단점 등을 유심히 살폈다. 맘에 들고, 형편이 어려운 학생에게는 한번에 목돈을 줬다. 액수가 놀랄 정도였다.

다이지타오는 군관학교가 적성에 맞지 않았다. 개교 한 달 만에 말 한마디 없이 자취를 감춰버렸다. 정치부 주임의 실종에 군관학교는 동요했다. “공산당이 국민당을 배제시키기 위해 다이 주임을 납치했다”는 등 온갖 추측이 나돌았다.

다이지타오의 실종은 자의에 의한 행동이었다. 공산당과는 상관이 없었다. 다이지타오는 자신의 이론에 충실한, 대논객이었다. 애들이나 부추기는 정치교육 따위에 관심이 없었다. 평소 “그간 원해서 한 일이 하나도 없다. 하고 싶었던 말을 못했고 쓰고 싶은 글을 쓰지 못했다”며 정치교육에 소극적이었다. 국공합작을 반대하던 국민당 우파들에게 “공산당의 주구”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속이 끓었다.

다이지타오의 빈자리를 프랑스에서 돌아온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가 차지했다. 파리에서 소년 공산당 창립을 주도했던 저우언라이는 학생들의 정치교육에 관심을 기울였다. 진보적인 학생들을 선발해 마르크스주의를 선전했다. 저우언라이는 부지런하고 매력이 있었다. 국민당에서 파견 나온 교관들에게도 환영을 받았다. 국민당 좌파와 왕래가 잦다는 이유로 “정치에 너무 관심을 갖지 말라”는 경고를 받은 예젠잉(葉劍英·엽검영)도 저우언라이의 영향으로 서서히 붉게 물들어갔다. 군관학교 내에 지부를 만들어도 될 정도로 공산당원 숫자가 증가했다.

다이지타오는 상하이의 서재에 틀어박혔다. 반공이론을 집대성한 ‘다이지타오주의(戴季陶主義)’의 체계가 잡히자 다시 광저우로 돌아왔다. 중산대학(中山大學) 총장에 취임한 후 틈만 나면 황푸를 찾아가 학생들에게 강의하며 우파 학생들을 상대로 학회를 조직했지만 저우언라이보다 한발 늦었다. <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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