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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업화로 치닫는 중공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중공의 정책은 북경에서 세워지지만 거대한 중공은 수도밖에 살고있는 중공인들이 이끌어간다. 다음은 US뉴스지 북경 지국장「제임즈·월리스」씨가 중공변경을 돌아보며 오늘의 중공을 소개한 글이다.
신강성의 노동자들은 보통 9시쯤 아침식사를 하고 10시가 되어야 공장이나 사무실로 출근한다. 이는 이들 노동자들이 늦잠을 자는 게으른 습관 때문에서가 아니고 관료주의에 기인한 것이다.
넓은 중공 땅의 서쪽에 있는 신강성은 북경이 정오 가까이 되어도 아직 깜깜한 새벽이다.
이러한 관료주의의 폐습을 타파하고자 중공 부주석 등소평은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혼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중공인들은 종종 관료주의의 소산에 대해 불평하기도 하지만 기본적인 제도에 대해서는 거의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있다. 북경당국의 조치나 지시에 따라 일상생활을 맞추어 나가는 것이 제도를 개혁하려는 것보다 나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중공을 얘기할 때 우리들은 흔히 쌀을 연상한다. 그러나 북쪽의 시골에서는 모질고 긴 겨울과 초여름 사이에 호배추가 유일한 식량이다. 첫서리가 내리기 전에 배추를 밭에서 뽑아내 도회지로 내다 팔고 스스로 끓이고 튀기거나 절여 먹는다.
갑자기 추위가 엄습하게 되면 공장의 노동자들, 군인이나 학생을, 심지어 관리들까지 밭에 나가 호배추 뽑는 일을 돕는다. 트럭의 긴 행렬이 호배추를 도회지의 창고로 운송한다.
북서지방에 있는 한 국영농장의 부 책임자로 일하는「지아·팅리」씨(62)는『1949년 겨울에 우리들은 너무 오랜 고생을 했다. 초근목피로 연명했으며 더우기 농사를 지을 농기구가 없어서 절에 있는 향로를 녹여 괭이나 삽을 만들었다』고 지난날을 회상했다.
그는 소련으로부터 트랙터와 영농기술에 관한 자문을 받기 시작한 l954년부터 55년께가 한 전환점이 됐다고 말했다.
거대한 농토에 상주인구도 늘어나고 여자들이 몰려와 가정을 이룬 60년대 중반을 가장 살기 편했던 시절이라고 얘기했다.
그러나 곧 문화혁명의 회오리가 불어 닥쳤다. 농사 짓는 일보다 구호를 더 강조하는 극단적인 좌익이 숙련된 농사꾼들을 밀어냈다.『 l966년부터 78년까지 거의 전 농장이 파산했다. 시장에서는 고기를 구경할 수도 없었다. 우리는 다시 배급제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고 말했다.
1977년 중공은 다시 실용주의로 돌아가「지아」씨는 지금 농사를 계속하고 있다.
성 문제에 있어서 중공은 아직 극히 보수적이다. 1982년도 캘린더에 모델로 나타난 여자들은 예쁘기는 하나 서방의 기준으로는 너무 점잖다. 무릎 위 4∼5cm, 목덜미나 겨우 드러낼 뿐이다. 그러나 이 정도도 논쟁의 대상이 된다면 주의 한 교사는『내 눈에는 그들이 전혀 아름답거나 건강하지 않다』고 불평했다.
당국의 엄격한 통제로 인해 예기치 않은 결과가 일어나기도 한다. 중공의 사회문제에 정통한 외국의 전문가들은 중공의 여러 도시에서 강간 등의 성범죄가 증가일로에 있다고 말한다.
문화혁명 기간에 움츠러들었던 예술활동은 최근엔 활기를 띠고 있다. 문화혁명 때 극좌파들이 문화적인 유산을 많이 파괴했으나 지금은 유적지와 전통예술을 재생시키기 위해 많은 돈과 시간이 투입되고 있다. 문화혁명 기간에 위선자·반동분자 및 살인자로 비방을 당했던공자도 복위됐다.
황하강 유역 난주 지방은 세계적인 화학공업기지다.
중공정부가 농업과 소비재 공업에 우선하고 있으나 난주에 있는 난주화학 공사는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다. 이곳의 종업원은 3만7천여명이나 돼 유휴노동력을 흡수하는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기술과 장비를 일본·서독 및 프랑스로부터 도입하고 거액의 차관을 들여 가동 된 공장이지만 이윤을 남기고 원가를 절감해 차관상환에 자신이 넘쳐있다.
중공은 확실히 변하고 있다. [US 뉴스지. 5월 3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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