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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나를 흔든 시 한 줄

곽병선 한국장학재단 이사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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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동은 햇살로
문을 발랐다

서는 산그림자로
병풍을 쳤다

그 안에
난초 한 잎

없는 바람에도
떤다

- 이성선(1941~2001) ‘나의 집2’

해·산·난이 시로 하나 돼
삶의 번잡함 씻어주네

우리 집 거실 잘 보이는 벽 액자에 담겨 있는 이성선의 시구(詩句)다. 서예가이자 국전 심사위원이었던 윤양희씨에게서 받은 것인데 다른 액자들은 때때로 바뀌었지만 이 액자는 자리를 지키고 있다. 아침에도 이 시를 보고, 저녁에도 본다. 멀리 집을 떠났다 돌아왔을 때도 이 시가 나를 반긴다.

이 시를 보노라면 우리말이 참 아름답다는 걸 느낀다. 간결하다. 그리고 깨끗하다. 해, 산, 난초가 하나로 연결! 내 거실이 하나로 통하게 하는 시다. 아울러 초연해진다. 또한 생명의 치열함과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경외를 느끼게 된다.

이 시를 읽노라면 내가 자랐던 충북 천등산 아래 석문동의 해맑던 소년으로 돌아간다. 나는 1942년 만주 목단강 유역 목능현에서 태어나 광복 직후 일가족이 이곳으로 옮겨왔다. 그곳의 자연을 보듯 마음이 맑아지고, 내 혈관 속에 불순물이나 찌꺼기가 시원하게 씻겨 내려가는 듯하다.

이 시의 작가인 이성선은 설악의 시인, 강원도의 시인, 산의 시인 등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시심은 자연에 대한 관조와 동양적 달관의 경지에 올랐다는 이야기도 있다. 온갖 번잡함에 둘러싸여 사는 이 서울 도심 속의 내 집에 이런 시와 함께 있다는 것이 참으로 행운이고 감사한 일이다.

곽병선 한국장학재단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