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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규연의 시시각각

고작 60.3점, 그것이 문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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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이규연
이규연 기자 중앙일보 탐사기획국장
이규연
논설위원

한 반에서 30명이 같은 시험을 봤다. 성적이 발표됐다. 1등 94점, 2등 90점, 3등 89점… 27등 81점, 28등 80점, 29등 77점. 그런데 골찌인 30등의 점수는 60점이었다. 1등에서 29등까지 촘촘하게 내려가던 점수가 30등에서 폭포 떨어지듯 내려앉았다. 실제 상황이었다면 30등 학생은 가정과 학교에서 호된 야단을 맞고 문제아로 찍혔을지 모른다.

 정부가 ‘한국 아동 종합실태조사’를 공개했다. 5년 만에 나오는 30개국 비교조사 결과다. 한국 아동들의 삶의 만족도는 30등, 실제 점수는 60.3점이었다. 1등(네덜란드 94.2점)은 물론이고 29등(루마니아 76.6점)과도 큰 격차를 보였다. 자살률과 사회배려지수에 이어 ‘아동이 불행한 나라’ 1위라는 부끄러운 지표를 하나 더 갖게 됐다.

 대한민국의 아이들이 가난하고 못 먹어서 불행한 것은 아니다. 영양상태나 빈곤율은 그런대로 순위를 유지했다. 불행도를 끌어올린 주요 요인은 세 가지였다. 학업스트레스, 학교폭력, 사이버중독. 그중에서도 학업스트레스가 다른 나라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았다. 과도한 학습과 시험, 획일적인 숙제가 아이들의 마음을 짓누른다. 조사 결과를 하나 더 인용한다면 아동결핍지수도 압도적인 1위였다. 점수로 54.8을 기록, 둘째로 높은 헝가리(31.9)와 큰 차이가 났다. 세 끼를 잘 챙겨먹지 못하고 교과서 외에 일반 독서를 거의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마침 경기도에 이어 서울에서도 초·중·고의 ‘9시 등교’가 추진된다. “아이들에게 아침잠을 챙겨주자”는 게 가장 큰 명분이다. 추진세력이 진보교육감들이다 보니 보수진영과 대립각이 생겼다. 등교시간은 나라마다 다르다. 미국의 경우 초등생은 우리보다 이르고, 고교생은 늦다. 독일은 모두 우리보다 이르다. 영국의 일부 학교는 10시에 오게 한다. 호르몬 변화를 심하게 겪는 청소년기에는 아침잠이 학습능력을 높인다는 나름대로의 근거를 댄다. 우리보다 등교시간이 이른 나라들은 그만큼 일찍 교실에서 해방시켜 준다. 스포츠·예능·독서 등 방과후 프로그램을 다양하게 운영한다. 이는 학업스트레스를 줄이고 정서결핍을 막아 건전하고 창의적인 시민으로 성장하는 데 기여한다.

 우리 아이들의 수면·휴식은 턱없이 부족하다. 등교시간도 이르지만 전체 수업시간이 긴 것이 문제다. 사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획일적인 교육내용이다. 학생이 조금 늦게 등교한다고 학교가 창의와 자율의 공간으로 ‘자동변신’하지는 않는다. 지금 구조와 관행이라면 ‘공부총량 불변의 법칙’이 통할 수 있다. 아침잠이 늘어난 만큼 취침이 늦어지는 것이다. ‘9시 등교’에 맞게 학교·직장이 변하지 않으면 맞벌이 부부만 골병이 들 수 있다. 다만 어떻게든 변하지 않으면 안 될 만큼 우리 아이들의 교육환경은 꽉 막혀 있다. 60.3점, 54.8점은 그 상징적 숫자다. 아이들을 획일적인 학업스트레스에서 벗어나게 하자는 논의의 원탁이 된다면 ‘9시 등교’는 검토해볼 만 하다

 박근혜 정부의 핵심 어젠다는 창조경제다. 창의와 혁신으로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 가자는 의미다. 많은 사람이 그 취지 자체에는 공감한다. 그렇지만 교육현장을 그렇게 바꾸려고 들면 반대가 만만치 않다. “인문학적 상상력” “세상을 바꾸는 새로운 생각” “융합과 통섭의 시대”를 외치면서도 아이들에게 숨 쉴 틈도 주지 않는다. 말과 행동의 분열증이 거리낌 없이 판친다. 김용 세계은행 총재는 지난해 방한했을 때 “아침 8시부터 밤 11시까지 수업하는 환경에서 창의적 인재가 나올 수 없다”고 언급했다. 5년 새 사이버중독 고위험군 학생은 7배로 늘었다. 아이의 3.6%가 ‘심각하게’ 자살충동을 느꼈다는 조사도 나왔다. 대한민국 아이들의 마음은 멍들고 지쳐 있다. 어떻게든 돌파구가 필요하다.

이규연 논설위원